2500년 전 저 히말라야 아래 인도 땅 붓다가야에 생사의 진리를 깨달아 해탈을 얻은 성자가 있었습니다. 그 분이 깨달음을 얻은 다음 중생을 바라보니 모든 중생이 가엽기 그지 없었습니다. 그래서 당신께서 깨달은 위대한 진리를 중생을 위해 설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그 분은 길을 떠났습니다. 붓다가야에서 녹야원까지. 지금 잘 닦인 길을 따라가도 260㎞, 700리길이었습니다. 6년의 고행을 마친 터라, 그리고 지금 막 깨달음을 얻은 터라, 그 분은 피골이 상접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깨달음을 얻은 육체는 오색 광명으로 빛나고 있었습니다. 작은 지팡이 하나에 의지해 떠나신 길. 가는 길에 그 분은 이교도의 수행자 한사람을 만났습니다. 이교도의 수행자는 모습은 초라하지만 오색 광명으로 싸인 성자께 물었습니다. “당신은 어느 문도의 수행자이길래 이리 환희롭습니까?” 성자가 답했습니다. “나는 누구의 문도도 아니요. 다만 깨달은 자요, 해탈을 얻은 자외다.” 이교도의 수행자는 이렇게 말씀하시는 성자를 비웃으며 돌아서고 말았습니다.
 뒤에 길에서 만난 그 성자가 고타마 싯다르타, 석가모니 부처님이었음을 알고, 바로 앞에서 만났어도 부처님을 알아보지 못한 자기의 박복함을 한탄하며 젓가락으로 자신의 눈을 찔러버렸다는 이야기가 경전에 있습니다.
 이 시대에 나 또한 그 이교도의 수행자처럼 박복하지는 않은가 돌아봅니다. 불교의 팔만대장경에 화엄경이라고 있습니다. 이 경은 깨달음을 얻으신 후 하늘중생을 대상으로 설하신 경입니다. 그런데 이 경전 속에는 마치 영화의 시나리오처럼 쉽고 재미있게 쓰여진 내용이 있습니다. 입법계품이라는 것인데 어린 선재동자가 세상을 만행하며 스승을 만나 진리의 말씀을 듣고 깨달음을 얻는다는 내용입니다. 선재동자는 쉰세분의 스승을 만납니다. 그런데 그 쉰세분의 스승이 누구인가. 관세음보살, 문수보살 같은 성인도 있지만 노동자, 술집작부, 창녀도 있습니다. 나는 이 경을 읽을 때마다 우리의 스승은 누구일까 라고 되뇌어 봅니다. 모습이 거룩하고 많이 배운 사람일까? 선재동자가 만난 쉰세분의 스승은 어느 누구 하나도 자기가 스승이라 말하지 않았습니다. 선재동자에 의해 스승이 된 것입니다.
 지난주 일요일, 한 가족이 우리 절에 올라왔습니다. 아주머니는 대웅전에 들어가 참배를 하고, 남편은 대웅전 뒤로 돌아가 여기저기 기웃거렸습니다. 우리 절에서는 개를 한 마리 기르는데 개가 자지러질 듯 짖었습니다. 그러나 그 분은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아들인 듯한 어린아이가 어른에게 말했습니다. “아빠. 멍멍이가 마구 울어. 들어가면 안되는가 봐.” 그 모습을 보며 세상엔 아이보다 못한 어른도 많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어린아이는 작은 우리 어른들의 스승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