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에 관한 우리의 궁금증과 의문은 사실 굉장히 많다.
 얼마 전의 일이다. 반백이 어울리는 중년신사가 필자의 사무실을 찾았다.
 앞으로 시작하려는 사업의 향방에 대해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어려서부터 애지중지 키워온 딸자식이 있었지요, 그런데 녀석이 그만….”
 말끝을 채 잇지 못하고 눈시울부터 붉히는 중년의 모습에서 딸아이에 대한 그리움이 짙게 묻어 나왔다. 삼풍백화점서 아르바이트를 하겠다고 나선 딸의 고집을 꺾지 못한 게 못내 아쉬운 듯 다음 말문을 열었다.
 “저희 집은 자손이 귀하지요. 지금도 그 애만 생각하면 가슴이 저립니다.”
 손이 귀한 집안에서 얼마나 예쁘게 키웠을까 생각하니 아픔이 그대로 전달되는 느낌이었다.
 수년 전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삼풍백화점 사고는 수백명의 목숨을 잃게 했다.
 대형사고로 수십, 수백명의 사람이 목숨을 잃는가 하면, 천재지변으로 한날 한시에 또한 전쟁으로 수십만명이 거의 동일한 시간에 목숨을 잃는 경우가 있다. 이런 상황을 대할 때 우리는 운명에 대한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과연 그들의 운명이 동일한 시간, 동일한 장소에서 한꺼번에 죽을 것이라고 결정지어졌을까?
 한날 한시 한곳에서 죽었다고 해도 그들의 사주가 똑같은 것은 아니지 않는가? 여기에 대한 명쾌한 해답을 내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 문제는 천지운(天地運)이라는 관점에서 보아야 할 것이다. 즉 천지는 천지대로의 운행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비명(非命)이라는 것이 존재한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 운도(運度)는 규칙적인 주기, 예컨대 춘하추동 시계처럼 변화의 주기가 있는가 하면 불규칙한 주기 등이 있으며 천지는 나름대로의 운을 가지고 있다. 천지의 운도에 의해 한 개인의 운명과는 크게 상관없이 사람들은 그 영향을 받으며 살기 때문에 운명의 변수는 작용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주학을 연구하면서도 또 다른 세계, 즉 천지와 자연의 이치가 함축적으로 담겨져 있는 근원적인 문제를 연구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439-0342 〈다음·복(伏)날의 의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