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승철 문화체육부장
일주일에 한 두 차례 이런저런 이유로 승용차를 회사에 두고 간 다음날 대중교통을 이용해 출근하게 되면 수인선 신포역에서 내려 걷게 되는데, 이 때마다 지나치는 곳이 인천중동우체국이다. 인천중동우체국 정문 옆 화단에는 1884년 11월18일(음력 10월1일) 근대 우정업무를 시작한 지 110 주년을 맞아 1994년에 세운 기념비가 있다. 그로부터 다시 만 23년이 지났으니 133년이 넘은 셈이다. 또 우체국 안 벽에는 한말의 정치가이자, 사회운동가, 독립운동가인 월남(月南) 이상재 선생이 초대 인천우체국장을 지냈다는 액자가 걸려 있다. 이 액자에는 이상재 우체국장은 우정국총판(郵政局總辦) 홍영식 선생의 권유로 1884년 당시에는 우정분국장(郵政分局場)으로 불리던 우체국을 이끌며 근무했다고 적혀 있다.
133년전에 비하면 불과 30여년전 이메일이 없던 시절, 신문기사도 원고지에 써서 보내거나 전화로 불러야 했던 시절, 편지는 소식을 주고받는데 매우 중요한 또는 거의 유일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 기다리는 소식이 있을 때면 '우체부 아저씨'로 불리던 집배원이 오는지 대문 밖에 나가서 서성거렸다.

#편지로 주고 받은 논쟁, 사랑, 일화
역사적으로는 편지를 주고받으며 남긴 유명한 일화도 많이 있다. 조선 중기의 학자였던 퇴계(退溪) 이황(李滉)과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이 '사단칠정론'에 대해 논하며 서로의 학문을 발전시켰다. 1558년부터 퇴계가 세상을 떠나는 1570년까지 13년 동안 이들이 주고받은 100여통의 편지들은 오늘날 '양선생왕복서'와 '양선생사칠이기왕복서'라는 구별되는 두 묶음으로 남아 있다. 그들은 스물여섯이란 연배 차이를 넘어서 때로는 스승과 제자처럼, 때로는 호각지세의 논쟁자처럼 많은 학문적 내용들과 삶의 고민들을 주고 받았다.
빅토르 위고와 출판사 간에 주고받은 편지는 동서고금을 통해 가장 짧은 편지로 잘 알려져 있다. '레 미제라블'을 쓴 위고가 작품에 대한 평판이 궁금해서 출판사에 '?'만 써서 "제 작품이 잘 팔리고 있습니까?"하고 묻자 출판사도 '!'만 써서 "평판도 좋고, 잘 팔리고 있습니다!"란 뜻으로 답해 길게 말하지 않았지만 멋진 소통을 나누고 있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청마(靑馬) 유치환이 정운(丁芸) 이영도를 향한 사랑을 읊은 시 '행복'이다. 기혼자인 유치환이 미망인이었던 이영도를 만나 20여 년 동안 뜨겁고 아름다운 '플라토닉' 사랑을 나누며 보낸 5000여 통의 사랑 편지는 주옥 같은 시로 남아 있다.

#편지를 대체한 '태블릿PC'가 바꾼 나라의 운명
그랬던 편지가 유선 통신이 생긴 뒤 무선 통신으로 발전하고, 핸드폰이 스마트폰으로 이어지고, 이메일이나 메시지 전송에서 페이스북이나 트위터로 카카오톡으로 '빛의 속도'로 대체되어 왔다.
지난 해 이맘 때 대한민국의 국민들은 숨가쁘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국정농단의 진실을 밝혀준 결정적 '스모킹 건'이 바로 최순실의 '태블릿 PC'였으니, 그들 국정농단 세력이 나름 '업무'를 편하고 빠르게 처리하게 사용한 게 편지나 우편을 대체한 첨단 도구였다.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만약 '태블릿PC'가 없었다면 나라의 운명도 바뀌지 않았고 문재인정부는 아직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열흘간 이어진 올해 추석 연휴 기간에 대해 한 선배가 "지난해 10월 '촛불'부터 올해 5월 대선까지 우리 국민 모두 너무 피곤하게 보내왔으니 그 정도는 쉬어주어야 하지 않겠냐"고 했을 때 그렇게 길어진 연휴가 역사의 신이 미리 정해놓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가기도 했다. 가을이 깊어지고 있다. 가을이 아예 지나가 겨울이 되기 전에 손편지 한 통 나눌 누군가를 그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