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재경 경제부장
몇해전 방송된 '남극의 눈물'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보면 펭귄(penguin)의 허들링 장면이 나온다. 영하 50도를 넘나드는 극심한 추위 속에서 알을 품은 펭귄들은 서로의 체온을 주고받으면서 안쪽 펭귄과 바깥쪽 펭귄이 교대하는 식의 허들링으로 생존을 유지한다. 매서운 추위에도 나만 살겠다며 안쪽을 고집하는 펭귄은 없다. 눈폭풍을 온몸으로 막아낸 바깥쪽 펭귄에게 안쪽 자리를 내준다. 양보와 배려속에 공생하기 위한 눈물겨운 몸부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 기업들은 모진 폭풍이나 눈보라 앞에 내쳐지는 것과 같은 경영 위기에 봉착하면 어떨까? 경영진이 나서 눈보라를 막아내기보다는 직원들이 바람막이가 되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특히 그중에서도 비정규직이나 계약직은 맨 앞에서 외풍을 견뎌내야 된다. 외풍을 견디지 못하면 조직에서 떨어져 나가게 된다. 이 모든 게 본인들의 무능력과 잘못이다.
영화 '카트'를 보면 이런 현실이 적나라하게 표현돼 있다. 대형마트의 경영진은 경영난을 감원으로 극복하려 한다. 점장은 직원도 마음대로 못 자르면 그게 회사냐고 소리치며 비정규직은 언제든지 해고할 수 있다고 여긴다. 웹툰만화를 드라마화 한 '미생'에서는 계약직이란 이유로 뒷전으로 밀려나는 미생들의 애환이 그려진다. 문재인 대통령은 비록 당장은 조직에 몸담고 있지만 언제 떨려날지 모르는 미생들에게 희망을 던져줬다. 문 대통령은 후보시절 1순위 공약으로 공공부문을 중심으로 한 고용창출로 81만개의 일자리를 창출하겠다고 했다. 2순위 공약은 정치 분야의 정치권력과 권력기관 개혁이며, 3순위 공약은 반부패·재벌 개혁이다.

문 대통령은 지난 5월 인천국제공항 공사를 방문해 "세계 1등 공항이란 평가 이면에는 인천공항공사 공무원의 85.6%가 비정규직이라는 노동자의 희생과 헌신이 있었다고 생각한다"면서 "임기 중에 비정규직 문제를 반드시 해결하겠다"고 밝혔다. 문 대통령은 공공기관의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해 '비정규직 제로(Zero)' 시대를 열겠다는 대선 공약 이행의 첫 발을 뗀 셈이다. 정일영 공항공사사장도 "인천국제공항공사의 비정규직원 1만여명이 전부 정규직이 될 수 있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청와대는 일자리 상황판까지 설치하고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라는 내용의 공문을 각 기관에 내려 보냈다. 무기계약직이나 비정규직이라는 단어조차 쓰지 말고 '공무직' 혹은 '업무직'이라 표현토록 했다. 비정규직을 없애는 것과 동시에 '비정규직'이라는 말도 함께 없애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정부는 최근 2020년까지 공공부문에서 상시·지속적인 업무를 하는 비정규직 근로자 31만6000명 중 20만5000명을 정규직으로 전환하기로 했다. 정부는 공공부문 비정규직 특별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공공부문 종사자 217만명 가운데 비정규직은 41만6000명으로 전체의 19.3%를 차지한다. 이 가운데 고용부가 지난 7월 발표한 상시·지속적 업무를 맡는 노동자는 31만6000명이다. 이들 가운데 2020년까지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대상은 17만5000명으로 취합됐다. 고용부는 60세 이상을 이유로 제외된 청소·경비 종사자 등 추가 전환 여지가 있는 3만명을 포함해 20만5000명을 최종 대상자로 확정했다. 부문별로는 정부 산하 공단을 포함한 공공기관이 9만6030명(전환율 71.2%)으로 가장 많았고, 지방자치단체 2만5263명(〃49.3%), 교육기관 2만5061명(〃 29.6%), 중앙행정기관 2만1054명(〃 69.7%), 지방공기업 7527명(〃 50.5%) 등의 순이다.
그러나 문제는 돈이다. 정부가 제대로 된 재원 지원 방안도 내놓지 않은 채 공공 부문 비정규직 근로자의 정규직 전환에 나서면서 각 지방자치단체나 공공기관은 볼멘소리를 내고 있다. 새로운 임금체계가 도입되고 용역·파견업체에 돌아갔던 수익이 정규직 전환 근로자 처우 개선에 활용되면 재정 부담은 크지 않을 것이라는 정부의 설명과 달리 막대한 추가 재원이 필요할 것으로 추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당장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에 필요한 재원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는 지방자치단체나 공공기관은 어떤 결정도 못하고 있다. 정규직 전환을 바라며 기대를 걸었던 미생들에게 기약 없는 '희망고문'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