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사를 시작한 지 7년 반만인 1918년 8월 5일 갑문 공사를 마친 일본인 우사미 토목국장과 호리데 기사 등 내빈들이 갑문 문위에서 기념 행사를 하고 있다.
▲ 인천항 개선벽 공사와 갑문 공사를 끝마친 1918년 10월 26일 처음으로 기선이 인천항에 입항하는 모습. 뒤로 보이는 게 응봉산 일대(현 자유공원 신포동)
▲ 중국행 여객선이 인천 내항에서 승객을 태우고 제2선거의 갑문을 빠져나가고 있다. 제2선거는 1974년 준공된 동양 최대 규모 현대식 갑문항이다.
▲ 100여년 전 인천항만 시설 축조로 인천은 경제 발전과 더불어 300만 인구의 대도시로 성장하게 됐다.
수도권 물류 관문인 인천항의 변천사는 2018년 준공 100주년을 맞는 제1선거와 대한민국 경제발전을 이끈 제2선거의 역사와 궤를 같이 했다. 일제는 인천항을 강제 개항해 대한민국 최초 갑문식 선거인 제1선거를 축조했다. 해방 이후 경제 부흥 시대가 열리자 인천항엔 두 번째 선거가 건설된다. 우리 손으로 만든 선거로 제1선거를 품은 동양 최대 규모 현대식 갑문항이었다. 수도권 물류 거점으로 국가 경제 성장에 기여한 제2선거는 오늘날까지 묵묵히 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 개항 전 인천항의 역할

고대부터 인천은 해상 교통의 요충지였다.
한반도의 허리이자 황해 핵심 지역에 자리 잡은 인천은 지형상 서해로 둘러싸인 작은 반도로 곳곳에 만이 발달해 있어 해상활동을 펼치기에 최적지란 평을 받았다.
인천은 고려시대 개경과 국제 교류의 관문으로서 발전했으며, 몽골 침략 땐 강화가 피난 수도가 됨으로써 중요성이 한층 커졌다.

시대가 바뀌자 인천은 침체기를 맞는다.

조선에서 자급자족적 경제 정책과 함께 대외적으론 중국 명나라와 같이 바다를 봉쇄하는 해금 정책을 펼치면서였다. 황해의 해상교통로는 전면 차단됐고 귀화하지 않은 외국인들은 모두 추방됐다.
사신 왕래와 대외 무역으로 번성하던 인천지역 항구와 포구들도 그 기능을 상실하고 평범한 농어촌으로 전락했다.

왜란과 호란을 겪은 17세기를 전후해 인천은 국방의 요충지로 떠오른다.
조선 후기 이양선(외국 철선)이 출몰하면서 조선정부가 경기만 일대 해양방어사령부인 제물진을 구축하자 인천은 한적한 어촌에서 한반도 군사 요새로 바뀌게 된다.

◆ 대한민국 최초 갑문식 선거 탄생

이후 1883년(고종 20년) 강화도 조약에 의해 제물포(현 인천항)가 개항했다. 근대 산업항의 역사도 이때부터 시작된다.

1907년에 이르러 인천항은 한국무역총액의 50%를 처리하는 국내 대표 항구로 성장한다.

개항 초기 인천항은 갑문 등 외곽시설이 없는 자연항인 탓에 큰 기선이 월미도 남쪽 수로에 정박하면 소형 선박이 기선에 탄 여객이나 화물을 잔교가 있는 부두로 운송해야 하는 비효율적 하역 방식을 취하고 있었다.
인천항이 이런 낡은 방식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일제 강점기 때다.
이 시기 대륙 침략의 병참기지로 활용된 인천은 중공업과 군수산업 중심으로 재편되고 이를 지원하기 위한 해변 매립, 도로 확장, 행정구역 확장으로 조선 최대 공업지대로 발전했다.
이 기간 커다란 변화는 인천항을 드나드는 선박이 해수의 높이와 상관없이 출입할 수 있는 이중 갑문식 선거가 1918년 완성·운영된 데 있다.
대한민국 최초의 이 갑문식 선거(제1선거)는 길이 454m, 폭 318m, 선거 내 수심 8~10m로 4500t급 외항선 3척이 동시 접안할 수 있는 규모를 갖췄다.
제1선거가 들어서자 인천항을 찾는 선박 수도 급속히 증가했다. 1910년에서 1939년에 이르는 29년 간 인천항의 총 무역액은 약 40배 늘어났다. 해방 직후엔 인천항의 수입항 기능이 활성화된다.

◆ 제2선거, 수도권 물류 관문 시대 열다

그러던 중 인천항은 1950년 6·25전쟁으로 치명상을 입는다.

인천상륙작전 당시 인천항은 항만시설과 시가지가 대부분 파괴돼 항만 기능을 사실상 상실한다.
인천항은 1955년부터 1959년에 걸쳐 이뤄진 항만사업 5개년 계획으로 재건될 수 있었고, 전쟁으로 파괴되거나 방치된 시설이 점차 제 모습을 찾아갔다.
1961년 12월엔 개항질서법이 제정돼 내·외국 선박이 상시 출입할 수 있는 국가 정식항으로 승격한다. 1973~1978년 제1단계 인천항 개발 사업으로 갑문방파제, 항만도로 등 각종 항만시설이 보완됐고, 내항 제4부두에 대한민국 최초 컨테이너 전용 취급시설이 완공됐다.
1974년엔 5만t급(길이 436.4m)과 1만t급(326.5m) 갑거 2기를 갖춘 동양 최대 갑문항인 제2선거가 준공되면서 인천항 내항은 완전 폐쇄형 항만 형태를 갖췄다.

1981년부터 1985년까지 제2단계 인천항 개발 사업이 추진되면서 내항 일부 부두엔 안벽이 연장됐고 석탄부두가 조성됐으며 컨베이어 시설·기중기 등 하역 설비가 보강됐다. 양곡전용부두와 싸이로(silo)시설, 제8부두도 이 시기에 생겼다. 한중 수교가 이뤄지면서 인천항은 고대부터 오늘날까지 이어져 온 중국 교류의 중심 역할을 확고히 하는 전기를 맞는다.
중국은 수교 직후인 1993년부터 인천항의 최대 수출국으로 부상했으며 1996년엔 최대 수입국으로 등극했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인천항은 시대적 변화의 중심에 서게 된다.

2005년 인천항만공사 설립으로 항만 운영 분야에 마케팅 개념이 도입되면서 국제항로가 확대되고 있고 배후부지에 복합관광단지를 조성하는 골든하버 프로젝트 등 굵직한 항만 개발 사업들도 추진 중이다.
현재 컨테이너 물동량 국내 2위와 수도권 물류 관문의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 인천항은 대한민국 해양강국 시대를 열기 위해 한 발 한 발 내딛고 있다.

/박범준 기자 parkbj2@incehonilbo.com

/참고자료=인천축항도록(사진)·인천항사(글)

▶용어 설명

1. 선거(船渠·wet dock)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바다의 높이와 관계없이 일정한 수위를 유지할 수 있도록 갑문을 설치해 항상 선박이 정박할 수 있도록 외해로부터 격리한 수역

2. 갑거(閘渠·lock culvert) 조석 간만의 차가 심한 항만에서 선거 내 수심을 일정하게 유지하고 선박이 입출항할 수 있도록 수위를 조절하는 갑문과 갑실, 구동장치 등 필요 시설의 총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