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의 뿌리는 국혼이오니 형식상 국혼이 덩굴 같도다. 형식상 국혼 썩지 않아야 오천년 무궁한 영생하리라. 슬프다 이천 모여서 오늘 덩구릅다 한탄 말아라. 국혼을 부르고 한 번 나가면 이 눈물이 변하여 영광되겠네. - 한국이민사박물관의 작자미상 <국혼가>

지난 9일부터 김보섭 작가의 <인천 화교 이야기> 사진전이 화교역사관에서 열리고 있었다. 화교 1세대의 삶과 풍경을 담은 것만으로 기록의 가치가 대단해보였다. 작가는 사진을 보며 인물들의 면면을, 장소와 건물의 세월을 이야기해주었다. 찬찬히 사진들을 보았다. 카메라를 바라보는 인물들은 대부분 굳게 입을 다물고 있었다. 단단한 입매와 선이 굵은 주름은, 내게는 '누구든지 나를 함부로 보지 않게 하겠다'는 강한 무언처럼 들렸다.

개항과 더불어 이 땅에 자리 잡기 시작했던 화교 1세대를 보면서 나는 문득 비슷한 시기 하와이로, 멕시코로 사탕수수 농장으로 떠났던 우리 동포를 떠올렸다. 화교들과는 엄연히 다른 삶이었다.
이민사박물관에 가보면 알겠지만 그들의 삶은 지옥과도 같았다. 그러나 그들은 그 지옥에서 살아남아 가족을 일구고, 뭉쳤다. 떠나온 고국에 대해 생각했다. <국혼가>를 부르며 국가의 부강을 생각했다. 그때의 우리 동포 얼굴을 누군가 사진으로 기록했다면 그 표정은 어땠을까.

지금은 지구촌 한 가족이란 말이 아주 낯선 것만은 아니다. 스마트폰은 어플만 깔면 여러 나라의 말을 번역도 해주고, 들려주기도 한다. 유명한 관광지를 찾아주고 맛집을 알려준다. 세계 어느 곳을 가든 우리 민족이 살지 않는 곳도 거의 없다. 그러니 그때의 그 아픔을 기록하는 이가 없었다면 어떻게 알 수 있었을까. 짐작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김보섭 작가의 사진작업이 결코 순탄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오랜 시간 화교와의 교류가 그들을 카메라 앞에 서게 했을 것이다.
화교의 삶을 기록하려 했던 김보섭 작가처럼, 누군가 타국의 사탕수수 농장에서 처참한 삶을 사는 우리 동포와 눈을 마주치려 했던 이는 없었을까. 그랬더라면 그 사진은 기록을 뛰어넘는 무엇이 되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사진에 대해서는 쥐뿔도 모르지만 말이다.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