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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시 명성로에 조선의 국모, 명성황후의 생가가 있다.

명성황후가 8살까지 살던 곳으로 조선 후기 여성 중심의 살림집 구조인 안채가 잘 보존돼 있다. 맞은 편 기념관에서는 명성황후의 친필, 시해 당시 일본인이 사용했던 일본도(복제품) 등을 볼 수 있다.

안동김씨의 세도정치를 무척이나 경계했던 대원군은 가문은 좋으나 세력이 미미한 16세 민자영을 15세 아들 이명복의 왕비로 간택했다.

하지만 명성황후는 상궁 이씨가 낳은 완화군을 세자로 책봉하려 했던 사건을 시작으로 대원군과 갈등을 겪게 되고, 마침내 남편 고종이 22세 되던 해 최익현으로 하여금 시아버지 대원군의 실정을 상소한다.

흥선대원군이 물러나자 명성황후는 쇄국을 풀고 일본 및 서구열강과의 개방 외교를 펼친다. 하지만 구식 군대의 불만이 표출된 임오군란에 궁궐에서 장호원으로 피신하게 되고, 권력은 일시적으로 흥선대원군에게 돌아간다.

그러나 명성황후는 자신의 국상을 선포하려는 대원군에게 청의 지원이라는 묘수를 두고, 흥선대원군은 청으로 압송된다.

이후 세도정치를 강화하던 민씨 일가. 이번엔 러시아와 손잡고 청일전쟁 등을 통해 영향력이 커진 일본군을 몰아내고자 한다.

하지만 일본은 일명 '여우 사냥'이라는 작전으로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시신을 궁 밖에서 불사르니, 이가 을미사변(1895년)이다.

명성황후에 대한 평가는 나라를 망친 장본인부터 구국을 위해 몸바친 여걸까지 극명하게 엇갈린다.

하지만 '지성적 인상의 가냘픈 미인'(이사벨리 비숍, 여행가)이자 '시대를 앞선 여성을 초월한 정치가'(윌리엄 샌드, 미국 서기관) 명성황후가 사건을 은폐시켜야 했던 일본에 의해 고의적으로 비하된 부분이 있음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경기도 문화유산과 문화유산관리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