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손님 안받는 '신포주점'
스지탕 전문 '대전집·다복집'
즉석 연주 열리던 '백항아리'
故손설향 시인 단골 '미미집'


배고픈 예술가들에게 밤낮없이 술을 기울이며 예술과 인생을 논하고 그 안에서 영감을 얻는 것은 가장 배부른 예술행위였다. 196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인천 신포동 일대를 주름 잡았던 대전집, 다복집, 신포주점, 백항아리 등은 예술에 목말랐던 문인과 화가들의 아지트로 기억된다.

낭만과 분위기를 찾아보기 힘든 시대에 단순히 먹고 마시며 즐기는 것이 아닌 예술인들의 슬픔을 애잔한 기쁨으로 승화시켰던 선술집은 새로운 의미로 다가온다. 지금은 대부분 사라졌지만 아직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는 곳들을 찾아 장소가 지닌 역사와 문화적 가치를 되돌아봤다.

술 향기로 가득했던 그 때 그 시절

6·25 이후부터 90년대에 이르기까지 신포동은 인천의 문화 중심지였다. 지역의 시인, 문인, 화가들이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던 신포동의 선술집들은 문화공간의 역할을 했다.

신포국제시장 골목에 있는 '신포주점'은 한 곳에서 자리를 지킨지 50년째다. 인천의 예술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거쳐갔으며 손님을 가려 받았던 것으로 유명하다.

화가 김진안 씨는 "군대 가기 전에 어른들과 함께 갔을 때는 아무말 없더니 제대 후 친구들과 들어갔더니 젊은 사람은 안 받는다고 쫓겨난 기억이 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지금은 들어갈 수 있는 연령대가 정해져 있는 술집을 상상하기 어렵지만 1대 사장을 지닌 김영숙 씨의 자존심이자 긍지였다.

이곳에서는 '김포(金鋪)약주'와 무찜, 잡탕 생선찜, 미역 데친 것 등 다양한 안주를 팔았고 빨래방망이로 문턱에 두드려 구워주는 복어가 가장 인기였다.

'뚫어진 천장에 청테이프, 온통 천장은 누더기지만 바로 이곳이 40년 역사라오. 온갖 고통 안고 슬픔에 이곳 들러 막걸리 한잔에 벗어버리고, 내 자리 네 자리 없는 한마음. 서로 웃으며 우리는 한 형제일세'

신포주점 벽면에 쓰인 글귀로 이곳이 누구나 친구가 되는 장소였다는 것을 추억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예술인들뿐 아니라 술 한 잔에 정을 나누던 손님들도 많았다. 오랜만에 이곳을 들렀다는 박인홍(67) 씨는 "혹시라도 예전에 같이 술을 마시던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싶어 가끔 오는데 항상 혼자 술을 마시다 간다"며 "오늘같이 비가 오는 날이면 그 시절이 더 그립다"고 말했다.

1972년 문을 연 대전집은 스지탕과 족발이 유명했다. 스지는 힘줄을 뜻하는 일본어로 소의 사태살에 붙어있다. 스지를 푹 삶아 양념을 해서 감자와 함께 끓여낸 것이 스지탕이다. 지금까지 그 맛을 잊지 못해 찾는 손님들이 많다.

오랜세월 신포동의 기쁨과 슬픔을 함께 한 장소로 주인장 오정희(78) 어르신은 지금도 가끔 대전집 앞에 나와 앉아있는데 그것이 이 집의 트레이드 마크이자 상징이다. 어르신은 신포동 골목의 여장부 역할을 하며 예의가 없고 고약한 사람들은 가게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했다.

내부에는 많은 예술가들이 찾던 장소답게 문인들의 작품이 전시돼있고 벽에 걸려 있는 1970년도 사진 속에서 대전집에 옛 풍경을 마주할 수 있다. 생선 궤짝을 모아 다닥다닥 붙인 천장은 또 하나의 예술 작품이다.

대전집 맞은편에 있는 다복집도 스지탕으로 이름을 알린 집이다. 유명 맛집 프로그램에 나오면서 신포동의 옛 시절을 모르는 젊은이들도 많이 찾는다. 고춧가루가 듬뿍 들어가 얼큰한 스지탕은 단골메뉴다. 기본 안주로 나오는 동치미는 입에 착착 감기는 맛이 일품인 것으로 알려졌다.


1967년 한복수 어르신이 창업했으며 지금은 부인 이명숙(72) 씨와 큰 딸이 운영하고 있다. 황토색 원형 식당과 옛 느낌이 물씬 풍기는 주방은 다복집의 역사를 증명한다. 30년째 이 집을 찾고 있다는 정재구(59) 씨는 "지금은 값이 많이 올랐지만 3000원이었던 스지탕의 맛을 잊지 못해 찾는다. 여러 사람의 인생이 서려있는 장소인 만큼 오래도록 남아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제는 신포동 골목에서 사라진 술집들 또한 여전히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자리잡고 있다. 술 한 병을 오백원에 팔았던 선술집 '백항아리'는 안주 없이 술만시켜도 야박하게 굴지 않았을 정도로 주인 할머니의 인심이 좋았다.

예술인들 사이에서 "백병원으로 주사 한 대 맞으러 가자"는 뜻은 백항아리에 술 한 잔 하러 가자는 말로 통하는 은어였다. 이 집에는 말 그대로 1m 정도 높이의 하얀 항아리가 있었는데 이것을 탁자 삼아 서서 술을 마셨다. 즉석으로 시 낭송회와 색소폰 연주회가 펼쳐질 정도로 낭만적인 풍경을 지닌 곳이었다.

인천의 해장국 전통을 이어오던 '답동관'은 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았던 예술인들이 맘 편히 드나들던 곳이다. 쉽게 외상을 해주고 주인집 딸은 은근슬쩍 해장국을 몰래 퍼줬다. 선술집이 아니었기 때문에 술판을 벌일 수 없었지만 예술가들에게 '누나'로 불렸던 주인은 다른 술집에서 먹은 술값을 계산해주기도 했으나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문을 닫았다.

이제는 찾아볼 수 없는 '미미집' 또한 예술이 흐르던 곳이다. 손설향 시인은 돌아가시기 전까지 매일 이곳에 앉아있었다. 그 외에 시인들도 주로 이곳을 많이 찾아 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문화 1번지 신포동의 가치


2009년, 인천 예술인들의 모임 '사람과 사람'은 문화의 중심 축이던 신포동을 되살리기 위해 다복집, 대전집, 신포주점에서 첫 전시회를 열었다.

수많은 예술인들이 오가며 일궈낸 뿌리가 더 이상 사라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회원 70여 명이 모여 지역문화를 부흥시키기 위해 의기투합했다. 다복집 문 앞에 걸려있는 고 최승렬 시인의 두상은 당시 작가들이 손부조로 직접 만들어 걸어둔 것이다.

동네가 예전과 다르게 쇠퇴하는 모습이 안타까워 시작된 활동은 그 이후 잠깐이지만 예술인들이 다시 신포동에 드나드는 계기가 됐고 거리는 활기를 띠었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인천에서 1960년대부터 이름을 날렸던 주점 '백항아리'를 소재로 한 창작극이 있다. 극단 자투리는 '백항아리집 큰 딸은 어디로 갔을까?'를 제작해 무대에 올렸다. 인천의 역사와 이야기를 담은 작품으로 과거와 현재를 교차하며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젊은이들의 욕망과 좌절, 꿈을 그렸다.

신승일 예술감독은 "창작극을 위해 신포동에 남아있는 선술집들을 찾아 손님들과 인터뷰하고 자주 오던 분들을 만나기도 했다"며 "3년 전 일이지만 인천에서 활동하는 연극인들이 지역을 이해하고 자부심을 갖는 계기가 됐던 것으로 기억한다"고 말했다. 세대가 바뀌었지만 예술인들은 인천의 문화 1번지였던 신포동을 살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글·사진 김신영 기자 happy1812@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