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잠든 노병' 괴롭히는 철거-존치 찬반 논쟁
▲ 맥아더 동상 앞에서의 기념 촬영은 일종의 '인증샷'이었다. 건립 초기 고(故) 한희융 서곶초교 교장(가운데)과 교직원들이 동상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 /사진제공=화도진도서관 심현빈 씨

1957년 만국공원에 건립 … '조성기금' 전국 공무원 월급서 갹출
인천상륙작전일 즈음 동상 '보존-반대 집회' 등 갈등 악순환


동상이몽(銅像異夢).

매년 인천상륙작전일(9월15일) 즈음해서 맥아더 동상은 한바탕 홍역을 치른다. 동상을 철거하자는 의견과 존치하자는 의견이 심하게 충돌한다.

맥아더 동상은 9·15 인천상륙작전이 거행된 지 7년이 지난 1957년 9월15일 인천 만국공원(현 자유공원)에 세워졌다.

동상 건립은 그해 4월 내무부의 발의로 추진되었다. 건립기금은 전국 25만명 공무원들의 월급에서 100환씩을 갹출해 조성하기로 했다. 공무원들의 불만이 터져 나왔는지 이 결정은 전 국민 성금 형태로 바뀐다.

이승만 대통령은 경무대 관저에서 열린 임시 국무회의에서 공무원을 대상으로 기금을 강제로 모으지 말고 '국민의 자유 의지'에 따라 모금하도록 지시한다. 동상건립위원장은 이기붕 민의원 의장이 맡는다.

당초의 건립 장소는 월미도였다. 동상 조각은 내무부의 발주로 홍익대 교수 김경승 씨가 담당했는데 그는 이 공로로 이듬해 서울시 문화상 (미술부문)을 수상했다.

건립문은 노산 이은상 시인이 썼고, 영문 번역은 시인 변영로의 형이자 외무부 장관을 지낸 변영태가 맡았다.

그런데 건립문 초안에 문제가 있었는 지 제막식 3일 전에 이기붕 민의원 의장과 내무장관, 문교장관이 국무원 사무국장실에서 급히 모여 건립문 중 일부를 삭제, 수정했다는 기사가 보도되기도 했다.

어떤 내용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알려지지 않았으며 그 건립문은 현재도 동상 기단 아래 박혀 있다.

인천시는 동상 제막을 위해 1000여평의 광장을 축조했고 광장에서 인천역 까지 약 3㎞ 도로의 포장을 했다. 동상 주변 조성 공사는 제막식 하루 전에야 겨우 끝냈다.

동원된 석공과 목공은 연인원 2500명이었고 소요된 자재는 석재 3000재, 시멘트 700포대였다. 동상 건립이 결정된 지 80일 만에 모든 걸 끝냈다.

1957년 9월15일 오전 9시20분 이승만 대통령을 제외한 대한민국 최고위급들이 모두 참석한 가운데 제막식이 거행되었다.

최규남 국방장관 식사(式辭)를 통해 "우리는 두 분의 맥아더 장군을 모시고 있으니 즉 한 분은 미주에 살아계신 그 분이요 다른 한분은 움직이지 않는 이 동상인데 우리는 영원히 이 땅에 머무는 이 맥아더 장군을 존경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다.

당초 이 제막식에는 동상의 주인공인 맥아더 장군이 가족들과 함께 참석할 예정이었다.

이를 위해 서울시는 제막식 다음날인 9월16일 오전 10시 서울운동장에서 환영시민대회를 대대적으로 개최하고 정부에서는 한국 최초의 일등건국공로훈장을 그에게 수여키로 계획을 잡았다.

그러나 77세의 맥아더는 건강상, 미국 정치 분위기상 등의 이유로 참석하지 않았다.

같은 모양의 맥아더 동상이 경복궁 안에도 하나 더 세워졌고 이듬해 2월에는 서울 세종로에 개관한 반공회관 앞에 비슷한 모양의 동상이 설치되었다. 반공회관의 이 맥아더 동상은 우리나라 역사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

1960년 4·19 혁명 때 시위대에 의해 이 반공회관이 일부 불타는 사건이 일어 났다. 그런데 그 앞에 있던 동상은 전혀 훼손되지 않았을 뿐 더러 그 목에 '공산 침략의 격퇴자' 라는 작은 현수막과 함께 화환이 걸렸다.

미 국무부는 이 상황을 전달받고 4·19 혁명이 항간에 떠돌던 반미 데모가 아니었음을 판단했다고 한다. 물론 그 때 인천의 동상도 손상되지 않았다.

인천에는 현재 자유공원의 동상 외에 또 하나의 맥아더 동상이 있다. 중구 신흥동 3가 인하대병원 바로 옆에 자리 잡은 CJ제일제당 인천1공장에 맥아더 입상(1.2m)이 있다.

'한국의 은인상'이란 이름으로 이승만 대통령(1.2m) 동상과 나란히 서있다. 고(故) 삼성그룹 이병철 회장이 이들의 업적을 영원히 기리기 위해 지난 1984년 세운 것이다. /유동현 인천시 '굿모닝인천'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