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정체성 찾기] 강옥엽의 '인천 역사 원류'를 찾아서
<49> 개항기 인천의 외국인들 - 국제도시 인천
▲ 각국 조계 지도.

1883년 제물포 개항과 더불어 인천에는 외국인들의 거류지가 조성되고 건축물, 시설 및 제도 등 근대문물과 문화가 이입됐다. 외국인들은 조선에서의 각종 이권 사업 교섭을 위한 영사관, 해관, 무역 관계자로부터 선교사, 여행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목적으로 방문했다. 근대의 길목에서 만난 이들 이방인들의 인천에 대한 인상과 거류지 현황을 통해 130년 전 이미 국제도시였던 인천을 재발견할 수 있다.

인천에 대한 타자의 시선

조선을 유럽에 소개한 최초의 책자는 1668년에 발간된 <하멜표류기>라 할 수 있다. 이후 수많은 이양선들이 조선의 해안에 출몰하기 시작했는데, 그 중 서양인들이 인천을 방문했던 최초의 기록은 영국의 바실 홀 함장이 1816년에 발간한 <조선 서해안 탐사기>이다. 서해안 일대를 탐사하고 대청군도를 해도에다 표기하면서 자신의 부친 이름을 따 'Sir James Hall Island'라고 명명했다.

독일계 미국 상인 오페르트는 1880년 <금단의 나라 조선>이라는 책을 남겼는데, 여기에 여러 날에 걸쳐 방문했던 강화도의 모습이 기록돼 있다. 이어서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 함대 사령관 로즈 제독이 제물포에서 한강을 거쳐 서울에 이르는 해도를 작성하면서 월미도를 자신의 이름을 따 'Roze Island' 라 표기했는데, 이 해도의 지명들은 이후 조선을 찾는 서양인들에게 그대로 전파, 통용돼 해상교통의 길라잡이 역할을 하게 됐다.

인천에 대한 서양인의 인상은 특히, 1886~1894년 사이에 방문했던 미국의 천문학자 퍼시벌 로웰(Percival Lowell), 미국총영사로 부임한 샤이레 롱(Chaille-Long), 프랑스의 민속학자 샤를 바라(Charles Louis Varat), 여행가인 아놀드 새비지-랜도어(Arnold H. Savage-Landor), 영국의 작가이자 왕립지리학회 회원인 이사벨라 비숍(Isabella B. Bishop) 등이 남긴 자료를 통해 짐작해 볼 수 있다. 내용의 대다수는 제물포 갯벌과 바다 풍경, 조선인의 작은 움막집 생활, 일본인과 청국인들의 거류지 현황에 대한 감상을 서양인의 시선으로 기록하고 있다.

외국인들의 눈에 비친 제물포는 초가지붕이 즐비한 모습에 갯벌이 드러난 채 항구로서는 조금 불편한 여건을 가진 곳이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제물포(濟物浦)라는 지명에 대한 각양각색의 해석이다. 러시아는 '상품을 건네는 항구라는 뜻'으로 기록하고 있고, 미국 감리회 선교사 존스는 '물건의 비축이나 보존을 위한 창고' 라 풀이하고 있다.

특히, 천문학자 퍼시벌 로웰은 <조선, 조용한 아침의 나라>라는 한국 기행기 속에 제물포라는 이름을 '여러 강의 둑'이라는 뜻으로 풀이하고 있다. 이러한 지명이 붙게 된 것은 이미 몇 천년 전에 제물포가 조선의 교역항이 되리라는 예언이 있었기 때문이고 이것이 곧 사실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또, '인천'이라는 이름을 '인간을 사랑하는 강'을 의미하는 것이라 풀이하고 있어 흥미롭다.

인천의 외국인 마을, 각국 공동조계

인천의 외국인 마을, 즉, 각국 조계는 1884년 체결된 제물포각국조계장정에 의해 일본 및 청국조계를 둘러싼 형태로 현 자유공원을 중심으로 총면적 46만2000㎡(14만평)로 구성됐다. 그러나 인천의 외국인 마을에 거주한 서양인은 많지 않았다.

제물포구락부가 신축됐던 1901년을 기준으로 개항장의 인구수를 보면, 전체 1만7507명 중 서구인들은 75명에 지나지 않았다. 이들 대부분은 영사관 직원이나 세관 직원, 통역, 선교사, 의사, 그리고 일부 상인이었는데 각국 공동조계의 땅은 모두 이들이 임차하고 있었다. 나라별 분포를 보면, 영국, 미국, 독일, 프랑스, 그리스, 네덜란드, 포르투갈, 스페인, 이탈리아 등 9개국으로 나타나고 있다.

외국인 마을인 각국 조계는 자치의회에 해당하는 신동공사(紳董公司)가 운영을 담당했다. 신동공사는 인천감리와 조계 내에 땅을 가진 국민이 있는 조약국(미국, 영국, 독일, 청, 일본)의 영사, 선출된 3명의 지주 등 9명의 의원으로 구성됐다. 여기에서는 조계 내의 사무와 각종 규칙을 제정할 수 있는 권한, 벌금부과권도 있었는데 벌금은 모두 조계 기금으로 충당됐다.

조계에서는 행정권 뿐 아니라 사법권도 독자적으로 행사됐고, 조계 내외를 막론하고 설정국의 범죄행위는 본국의 법률에 따라 그들 영사에 의해 처리되는 영사재판이 행해졌다. 조계는 강력한 행정권과 함께 영사재판이 행해지던 치외법권적 특수권익지구로서 마치 '나라 안의 나라'처럼 됐던 것이다.

인천의 외국인들

인물의 활동 영역에 따라 여러 가지 유형으로 나눠볼 수 있다. 아펜젤러, 존스, 랜디스는 종교, 의료 및 교육활동을 했던 대표적 인물이다. 아펜젤러 목사는 1885년 인천항에 입국해 내리교회, 한국선교회 및 배재학당, 정동제일교회를 설립했고, 언더우드, 존스 등과 함께 지방을 순회하면서 전도활동을 했다.

인천내리교회의 존스 목사는 1892년 4월 최초의 사립 교육기관인 영화학교를 인천에 개설했고, 최초의 영문 잡지 발간과 편집에도 관여했으며, 하와이 이민사업에도 관계했다. 성공회 의료선교사인 랜디스 역시 중구 내동에 인천 최초의 성누가병원을 건립하고, 헌신적인 의료 활동으로 '약대인'이라 불렸으며, 영어학교와 고아원도 운영했다.

종교 활동 외에, 외교관이자 의료선교사였던 알렌이나 우리탕 등 영사관이나 해관 등 공공기관에서 활동했던 인물, 타운센드, 데쉴러, 모스, 칼 발트, 존스톤 등 중개무역이나 각종 이권사업, 상업 활동을 했던 사업가, 그리고 사바찐 등 건축이나 기반시설 마련을 위해 와 있던 인물들이 있다.

특히, 알렌의 경우는 갑신정변때 민영익을 치료했던 계기로 왕실 의사와 고종의 정치 고문이 됐으며, 최초의 근대식병원인 제중원 설립에 기여했던 인물이다. 특히, 데쉴러, 모스, 타운센드 등은 알렌의 후원아래 인천을 무대로 경인철도부설사업, 운산금광채굴사업, 각종 무역사업 등에 협력관계를 형성했다.

역사적 경험, 인천 가치 창조의 원천

현재 인천은 송도, 청라, 영종에 경제특구를 조성하면서, 유엔국제기구(GCF), 세계은행, 글로벌캠퍼스, 그리고 국립세계문자박물관을 유치하고 국제도시로 나아가고 있다. 개항과 더불어 130년 전 국제도시였던 역사적 경험은 지금도 유효하다. 그리고 그 흔적은 우리나라 최초인 청학동 외국인묘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인천시 역사자료관 전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