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유 시인·문학치료사
▲ 김지유 시인·문학치료사

칼 융이 말했다. "나는 선한 사람이 되기보다 온전한 사람이 되고 싶다"고. 융에게 온전함이란 빛과 어두움 모두를 포함한 것으로, 우리가 되고 싶어 하는 모습인 '페르소나'(자아)가 빛이요, 환경에 의해 스스로 거부하거나 억압해온 내면인 '그림자'가 어둠이다. 흔히 세속적이라 불리거나 불편한 감정들조차도 인정할 때 비로소 평온한 마음의 농도가 유지된다는 말일게다.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할 일이 일치하면 좋으련만, 그런 행운은 드물게 온다. 이분법에 길들여진 일상은 둘 중 하나를 포기시킨다. 대체로 선택되는 쪽은 우리가 '바르다'고 배워온 페르소나이다. 관습과 타성에 젖은 잣대는 언제나 그림자에게 냉혹하다.

희생당한 그림자는 억울하게 눈치를 보다가 엉뚱한 곳에서 폭발해 버린다. 작게는 사소한 말다툼이나 뒷담화, 무시 등으로 드러나고, 크게는 '보복 운전'이나 '묻지 마, 폭행', 또는 '개막걸리녀 사건'처럼 동물학대의 형태로 터지기도 한다.

경찰청에서 최근 보복운전을 집중 단속한 결과를 보면, 가해자의 99%가 남성이며, 이들의 50% 이상이 일반 회사원이라고 한다. 수다를 통해 그림자의 억압을 찔끔이라도 털어놓는 여성에 비해, 해소 방법을 찾지 못하는 직장 남성들의 스트레스가 심각해 보인다. 밀폐된 혼자만의 공간인 차에서 이루어지는 비이성적인 과격행동의 표출 역시 억눌린 그림자의 항변이라고 볼 수 있다.

이렇듯 막무가내로 튀어나오는 그림자는 위험하다. 스스로조차 거부한 감정의 에너지는 억압당한만큼 막강하다. 안전한 공간과 방법이 아니라면, 타인에게 상처가 되고 나의 일상생활에도 큰 타격을 준다. 페르소나의 이야기는 타인에게도 잘 드러내는 반면, 그림자의 이야기는 스스로도 듣고 싶지 않은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피하고 싶은 업무가 내게 주어졌을 때를 생각해 보자.

어쩔 수 없이 짊어진 업무의 고단함을 당연함이 아닌 인정으로 바라봐 주는 이들이 있다면 그나마 위로가 되지 않던가. 우리의 그림자도 똑같다. 잠시잠깐 들여다보며 너도 있구나, 인정해주기만 해도 불쑥, 불쑥 폭발하지는 않는다.

안전한 방법 중 하나로 낙서를 권하고 싶다. 저널치료나 글쓰기치료라고 하면 부담스러우니 그냥 낙서라 하자. 그림자에게 종이 위는 안전한 장소이다. 스프링노트나 작은 수첩이어도 좋다. 스케치북을 선택해 한 장씩 쓴 후, 그 자리에서 바로 찢어버려도 좋다.

기하학적인 도형이든 그림이든 상관없으며 욕만 잔뜩 쓴다 해도, 문장이 아닌 단어들만 나열해도 그만이다. 일단 써 보자. 비도덕하다거나 창피하다고, 두렵다고 외면한 억눌린 그림자의 고함을, 있는 그대로 쏟아내 보자. 어느 누구도 당신의 낙서를 분석, 비난하거나 평가하지 않는다.

정황상 어쩔 수 없이 페르소나를 선택했으나 그로 인해 심각한 스트레스를 느끼는 순간이 오면, 잠시 앉아 종이 위에 그림자의 통곡을 들어주면 된다. 이 때 중요한 것은 5분의 시간을 정했으면, 5분 동안 펜을 멈추지 말고 계속 써야 한다는 것이다.

시간은 상황에 따라 줄이거나 늘리면 된다. 맞춤법이 틀려도, 말이 안 되는 비문이라도 괜찮다. 낙서는 결과물이 중요하지 않은 행동 그 자체의 놀이이다. 논리적이기를 강요받는 시대에, 별 의미 없는 듯 선을 그어대고 무의식적으로 떠오르는 단어들을 속사포처럼 나열하고 나면 아마도 조금은 숨통이 트일 것이다. 딱, 5분이다. 답답함을 느끼는 순간마다 해도 좋고 일기처럼 잠자리에 들기 전에 써도 좋다.

그림자는 좋고 나쁨으로 구분해야 할 감정이 아니다. 구름처럼 자연스레 흐르는 에너지이기에 억압한다고 해서 사라지지도 않는다. 오래 머물고프던 첫사랑처럼 끝끝내 당신 안에 머물러 떠나지도 못하고 쓸쓸히 묻혀 있는 것이다. 상처투성이로 숨겨진 자신의 그림자와 5분만 놀다 보면, 아픈 그림자는 곧 창조적인 에너지로 흐를 것이다.

경찰이 오는 10일부터 한 달간 보복운전 특별 단속기간을 가지고,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의 흉기 등 협박죄를 적용해 엄하게 처벌한다고 한다. 평상시와 다른 감정이 치솟아 손가락이 떨리거든, 운전대를 잡기 전에 딱 5분만 그림자 낙서를 하자. 스스로 읽어주지 않는다면 가혹한 무게로 당신을 짓누를 그림자가, 마법처럼 놀라운 에너지로 바뀌어 당신을 든든하게 지켜줄 것이다. /김지유 시인·문학치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