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악 전염병' 시민 속수무책 … 질병퇴치·보건 혼신 기울이다
일제강점기 사망률 최고 … 가난·비위생 등 원인
1940년 '연수장' 인천결핵요양원 남한 최초 개원
시, 침·가래뱉어 담는 '타구' 설치 이색예방 행정 요양원 환자 증가 … '병실 증개축' 편의 제공도
▲ 1957년 인천결핵요양원 앞뜰에서 고아 결핵 환자들이 간호사들과 햇볕을 쬐며 놀이를 즐기고 있다.
메르스 만큼이나 무서운 전염병이 결핵이다.

'후진국 질병'이라 여긴 결핵이 다 퇴치된 걸로 알고 있지만 지금도 우리나라에서 매년 2000명 이상이 결핵으로 목숨을 잃는다.

인구 10만 명 당 5% 정도의 사망률을 보이는 전염병이다.

얼마 전 연수구의 한 중학교에서 103명(학생 101명·교사 2명)의 결핵 환자가 발생해 임시 휴업에 들어간 적도 있다.

일제강점기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결핵 사망률을 기록했다.

불결한 환경과 굶주림 속에서 집단 노동에 시달린 것이 주원인이었다.

특히 외부로 열려 있는 항구이면서 전국 노동자들이 모여 일하는 공장들이 많았던 인천은 전염병에 쉽게 노출되었다.

결핵 환자가 계속 늘어나자 조선적십자사는 결핵요양원을 설립하기 위해 전 조선을 뒤져 물 맑고 공기 좋은 곳을 물색했다.

낙점된 곳은 당시 사람의 발길이 거의 없었던 부천군 문학면 연수리(현 연수구 연수3동) 구릉지였다.

인천결핵요양원은 1940년 11월20일 '연수장(延壽莊)'이란 이름으로 개원했다.

'목숨이 연장 된다'는 의미의 마을 이름과 절묘하게 맞아 떨어진 병원명이었다.

남한에서는 최초로 세워진 결핵전문병원이었다.

너무 외져서 접근하기 쉽지 않아 적십자 측은 수인선을 운영하는 경동철도주식회사에 송도역과 남동역 사이 요양원에서 가장 가까운 지점에 임시 정거장 설치를 요구했다.

수인선 기차는 결핵요양원을 위해 역 시설도 없는 임시정거장에서 1분간 정차를 했다.

6·25 전쟁으로 헐벗고 굶주린 한국인의 건강은 계속 악화됐다.

망국병인 결핵 퇴치를 위해 인천시는 매년 12월초 1주일간을 결핵예방주간으로 설정했다.

계몽 강연회를 수시로 열고 포스터를 학교와 거리에 붙이는 등 예방에 만전을 기했다.

그 중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특이한 예방 행정이 있었다.

'타구' 혹은 '담(痰)통'이라 불리는 가래나 침을 뱉어 담는 그릇의 설치를 법령으로 위무화한 것이다.

학교, 병원, 제조소, 선박발착대합실, 철도정차장, 극장, 다방, 음식점, 이발소 등 도지사가 지정하는 장소에는 적당한 수의 타구를 배치해야만 했다.

인천시가 발행한 주간 신문 '인천공보' 1953년 8월5일자에는 시 보건과장(정귀학)이 쓴 '타구 설비의 중요성'이란 기사가 실렸다.

'타구 안에는 액체 소독제를 투입하여두는 것이 원칙이나 형편에 따라서는 냉수로 대용하는 것도 무방한 바 필히 조석마다 제거하여야 하는데 침은 지하에 매몰하거나 변소에 투기하여야 한다.

대중의 출입 장소에는 물론 각 개인 가옥에도 타구를 설치해 노상(路上) 토담(吐痰)을 스스로 억제함이 필행(必行) 조건이라고 믿는다.'

60년대 접어들어도 결핵 환자가 줄지 않자 급기야 정부는 1968년 서울, 부산, 인천 등 5대 도시 모든 동사무소에 결핵 관리요원 1명씩을 배치하는 계획까지 세웠다.

그만큼 당시에는 결핵이 국민보건은 물론 국가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엄청났다.

인천결핵요양원에도 환자들이 밀려들어왔다.

인천시는 환자들의 편의를 위해 송도역에서 요양원까지 가는 도로를 뚫었고 병실을 증개축 했다.

앞뜰을 3000평으로 넓히고 잔디와 옥향나무 등을 심어 대저택의 정원처럼 꾸며 놓았다.

소나무 숲 너머 염전과 갯벌 사이를 달리는 수인선 협궤열차의 목가적 풍경은 환자들에게 안식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영화 촬영의 단골 장소가 되기도 했다.

90년대 들어 입원 환자가 감소하면서 요양원의 운영이 점차 어려워졌다.

1991년 연수신시가지 건설계획에 따라 1000여평의 땅이 수용되면서 아름다운 정원이 뚝 잘려나갔다.

반세기 동안 이 땅의 무서운 결핵균에 맞서 사투를 벌였던 인천결핵요양원은 1996년 6월5일 문을 닫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유동현 인천시 '굿모닝인천'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