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성원 인천미래구상포럼 대표패널 / 인하대 강사
▲ 고성원 인천미래구상포럼 대표패널 / 인하대 강사

1951년 9월 8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모인 각국 대표들은 연합국과 일본의 전쟁상태 종료를 확인하는 문서에 서명했다. 소련은 반대했고 중국은 배제됐지만 다른 48개국 대표들은 이를 받아들였다.

이로써 성립된 샌프란시스코 체제는 기존의 제국주의적 세계질서가 전후(戰後) 냉전적 세계질서로 재편되는 과정에서 일본을 반공(反共)진영에 편입하는 대신 그 반대급부로 사실상 전쟁의 책임을 면책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이라고 불리는 이 조약은 1952년 4월 28일 발효됐다.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반공진영 내에서 일본은, 유럽에서 독일이 그랬던 것처럼, 아시아에서 미국의 중요한 전략적 파트너로서 지위를 부여받았고 냉전이 심화될수록 아시아권 내에서 미국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한 일본의 입지는 강화되어 갔다.

종전(終戰) 70년을 맞은 2015년 아베 일본총리는 조약발효일인 4월 28일 미국을 방문해 오바마 대통령과 회담하고 상·하원 합동의회에서 연설을 했다. 그리고 이 기간동안 양국은 미·일 안전보장위원회를 개최하고 자위대(自衛隊)의 활동범위를 일본 국외로 확대하는 내용으로 방위협력지침을 개정하는 데 합의했다.

샌프란시스코 조약을 통해 냉전체제의 중요한 한 축으로 역할을 부여받으면서 미국 등 국제사회의 묵인하에 과거사 문제에 대해 책임회피와 기피로 일관하고 있는 일본은 한국과 중국을 위시한 주변국들의 거센 비난과 항의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아무런 사죄나 반성없이 전범(戰犯)국가의 멍에로부터 벗어나려고 시도해가는 모양새다. 다수의 언론이 관측하듯이, 종전 70년 아베 담화가 각의(閣議) 결정이 아닌 개인자격으로 발표될 것이라는 예측도 같은 맥락을 가지고 있다.

이같은 상황에서 지난 22일 한·일 국교정상화 50주년 행사에 양국 정상이 교차참석한 것을 두고 미 국무부가 즉각적이고 전폭적인 환영과 지지의 뜻을 나타내고 있는 것도 당일 아베 총리가 언급한 '전략적 이익'과 맥을 같이 한다. 당일 행사장 무대에 등장한 주인공은 한국과 일본의 두 정상이었지만, 무대 뒤에서 실질적인 주인공은 일본과 미국이었고, 한국은 조연에 불과했다.

그동안 한국은 내내 위안부 문제를 포함한 과거사 문제를 제기해왔지만, '한·미·일 삼각동맹'과 '전략적 이익'이 두드러지게 강조되는 마당에 과거사 문제를 '그냥 덮고 지나가자'는 분위기에 휩쓸릴 우려는 오히려 더 커졌다.

22일 행사 이후 한·일 양국은 국방장관 회담을 포함한 다방면의 군사교류를 본격화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고, 그 이면에는 미 국방부의 요청이 있었다는 관측 보도도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한·일간 관계개선에 이어 군사교류 확대, 한·미·일 안보삼각동맹에 이르기까지 미국이 이처럼 적극적으로 팔을 걷어부치고 나서는 데에는, 일본과 더불어 미국의 '전략적 이익'이 자리하고 있다. 한·일간 관계개선은 말하자면 미국의 '전략적 이익'에 부합하는 일본의 '전략적 이익'에 따라 생성된 산물이다.

미국은 지난해 발표된 2014 QDR(4개년 국방검토보고서)에서 '아태지역의 평화와 안전'을 정책의 최우선순위로 내세우면서, '기존 동맹국 및 동반자 국가들과의 관계 강화'를 정책목표의 하나로 강조한 바 있다. 이 보고서에는 2020년까지 해군전력의 60%를 아태지역에 배치하겠다는 계획도 포함되어 있다.

여기에 더해 미국은 세계 경제규모의 40%를 차지하는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도 계획하고 있다. 여기에는 최근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을 통해 국제적인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중국의 움직임에 대한 견제의도가 담겨있다.

냉전이 해체된 1990년대 이래로 미국은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 이른바 '중국위협론'을 공공연히 제기하면서 중국에 대한 견제와 균형을 반복해왔다. 그리고 그 연장선상에서 오바마 행정부는 미군의 군사전개의 중심을 유럽과 중동으로부터 아태지역으로 전환하는 '아시아 회귀(pivot to Asia) 전략'과 '재균형(rebalancing) 정책'을 추진하고 있고, 60여년전 샌프란시스코 체제가 그랬던 것처럼 '아시아 회귀' 전략프로그램에서 미국에게 일본은 여전히 중요한 전략적 파트너가 되고 있다.

제국주의 체제의 피해자였으며 냉전체제의 산물인 분단체제를 안고 있는 한국의 입장에서 작금에 진행되고 있는 이같은 현재적 상황들은 결코 바람직하지만은 않다. 외교적 주도권은 제약되어 있고 한국이 공유할 '전략적 이익' 또한 제한적이다. 일본에게는 '종전 70년'인 2015년은 한국에게는 '분단 70년'이기도 하다.

제국주의와 과거사의 상처는 아직도 여전하고, 냉전과 분단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과거사와 분단, 끝까지 놓치지 말아야 할 외교적 화두다. /고성원 인천미래구상포럼 대표패널 / 인하대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