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동현의 사진, 시간을 깨우다] 35. 용동마루턱에 세워진 아치형 선전 철탑
도로폭 협소·통행불편따라 일부 시민 홍예문 이용
대로 확장 후 '참전용사 귀환·행사 행렬' 통로 사용
▲ 1978년 용동마루턱에 세워진 아치형 선전 철탑의 준공식 모습. 한 때 인천의 중심가로 들어오는 관문을 상징했던 이 철탑은 지역의 쇠퇴와 맞물려 철거됐다.
세월이 흐르면서 잊혀진 지명들이 있다.

용동마루턱도 그 중 하나다.

'마루턱'은 산마루의 두드러진 턱(언덕)이다.

예전에 어른들이 흔히 '용동마루테기'라고 부른 이곳은 현재의 내리교회 정문 앞 고개를 말한다.

동인천역에서 답동, 신포동 방향으로 올라가는 경사진 큰 길의 정상부를 일컫는다.

이 길이 인천 도심을 대표하는 대로(大路)로 확장된 때는 광복 이후이다.

그 전까지 이 길은 그리 큰길이 아니었다.

일제강점기 현재의 중앙동, 송학동에 사는 사람들은 주로 홍예문을 이용해 걷거나 우마차로 상인천역(현 동인천역)에 닿았기 때문에 그렇게 효용성 있는 길은 아니었다.

지금보다 훨씬 가파른 고갯길이었기 때문에 통행도 쉽지 않았다.

일제 말 차량이 증가하면서 홍예문길이 불편해지자 큰길이 필요했다.

상인천역에서 용동마루턱을 넘어 답동에 이르는 길의 일부 구간이 착공되었지만 해방을 맞으며 중단되었다.
패망 전 일제는 미군의 공습에 대비해 인천 도심지 곳곳을 비워두는 소개(疏開)작전을 펼쳤다.

그로 인해 상인천역과 답동 간 언덕에는 헐린 집터들이 많았다.

광복 후 인천시는 그 점을 이용해 넓은 길을 내는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이 소개지 공터에 전재민(戰災民) 등이 무허가로 집을 짓고 살기 시작했다.

철거민들의 집단 반발로 공사는 순탄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6·25 전쟁을 맞게 되었다.

전쟁 후 다시 이 사업을 재개했지만 여전히 철거 문제가 걸림돌이었다.

인천시장은 1953년 5월 5일 인천시가 발행한 주간신문 '인천공보'에 경고문을 게재했다.

'본년 3월20일자 인건(仁建) 제60호에 의한 지장물건물 철거 명령에 순응하여 조속히 철거를 실행할 것. 만약 본월 15일한 본건을 이행치 않는 자에 대하여는 시가지 계획령 제35조 규정을 적용하여 엄중 조치하겠음'. 이에 해당 지구 주민들은 탄원서를 제출했다.

'남북통일이 실현되고 평화가 도래할 때 까지 철거를 유예해 줄 것'이란 내용을 담았다.

1953년 4월 200여 채의 주택 철거 문제를 해결한 후 다시 본격적으로 공사에 착수했다.

시멘트, 철근 등 미군 측으로부터 자재를 원조 받아 1955년 3월 폭 30m, 연장 615m의 도로를 뚫었다.

현재와 같은 도로는 1970년대 초에야 완성되었다.

이후 많은 시민들이 동인천역에서 신포동과 답동사거리를 가려고 이 마루턱을 넘었다.

월남 참전용사 귀환, 백옥자의 아시안게임 금메달 획득 축하 등 각종 환영 카퍼레이드를 비롯해 시민의 날 등 길놀이 행사 행렬도 대부분 이 길을 통과했다.

이 고개는 동인천과 신포동을 경계 짓는다.

한때 이 용동마루턱을 기준으로 신포동과 경동은 어른들의 공간이요, 인현동은 학생들의 천국이었다.

많은 차량과 사람들이 오고가던 이곳에 1978년 웅장한 아치형 선전 철탑이 세워졌다.

반원형 모양의 거대한 철탑을 처음 대했던 시민들은 이만한 규모의 철 구조물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사진 속 파리의 에펠탑을 연상했을 지도 모른다.

시청사가 현 중구청에 있었던 당시 이 마루턱 철탑은 일종의 관문 역할을 했다.

동인천역을 통해 들어오는 외지인들에게 이 문의 통과는 인천 중심가로 들어온 의미를 부여했다.

인천시는 본래의 목적대로 이 철탑에 시 기념행사, 국가 시책, 시정 공표, 사회계몽 등 일 년 내내 각종 선전물을 붙였다.

행인의 통행이 빈번한 거리 마루턱에 자리 잡았던 까닭에 최적의 장소에 최적의 선전 철탑으로서 행인들의 눈길을 끄는 데는 이만한 곳이 없었다.

현재 이 철탑은 사라졌다.

언제 없어졌는지 기록이 없고 기억도 없다.

아마 시청사가 구월동으로 이전한 직후 혹은 동인천 지역이 쇠퇴기에 접어들어 섰을 때 슬며시 '용도 폐기' 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인천시 '굿모닝인천'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