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정체성 찾기] 강덕우의 '인천 역사 원류'를 찾아서
40> 근대 최초의 예술 공간, 협률사(協律舍)
▲ 정치국(丁致國) 관련 기사.

인천의 연극을 논함에 있어 그간 지역 문화예술계에서는 1895년 정치국(丁致國)이 개관한 인천 경동의 협률사(協律舍)를 한국 최초의 극장이라 주창해 왔다.

이는 그간 한국 최초의 공연장으로 정의되고 있는 서울 정동에서 문을 연 1902년의 협률사(協律社)보다 7년, 이인직(李人稙)이 종로 새문안교회터에 창설했던 1908년의 원각사(圓覺寺)보다 14년이나 먼저 개관한 것이다.

협률사는 개항 이래 격동의 그 긴 시간만큼 인천 문화예술의 큰 축으로 자리매김했고, 문화예술인들의 혼이 담겨 있는 산실이자 인천 문화예술의 선구성과 저력을 보여주는 실례였다. 인천의 문화예술 활동은 이러한 토양으로부터 출발한다.

인천의 근대식 공연장

1901년 내리교회의 존스(한국명 조원시) 목사는 1월호에 기고한 라는 글에서 "1900년에 들어섰을 무렵 이미 인천에는 3개의 영사관, '2개의 극장', 7개의 은행, 다수의 목욕탕, 수 개의 교회단, 수 개의 호텔 등이 있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2개의 극장. 그 하나는 1933년에 간행된 <인천부사>에서 확인된다. "부청 서쪽인 중정 1정목(현 관동)에 100석 규모의 화도(火道)를 갖춘 극장을 (일본)거류민의 위안을 위해 개설하였는데, 이후 명치 30년(1897)에 산수정 2정목(현 송학동)으로 옮겨 극장 양식으로 신축하여 '인천좌(仁川座)'라 불렀다"는 것이다.

서울의 일본인들이 자신들이 집단 거류지에 연극 전용극장을 최초로 설립한 시기를 1906년 무렵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이에 비하면 인천 지역에서는 그 시기가 훨씬 앞섰음을 알 수 있다.

1895년 인천 거주 일본인이 4148명, 서울은 1939명이었고 1903년에도 인천 6433명 서울 3673명 인 것을 감안할 때 서울보다 먼저 출발했다는 것이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그리고 그 또 다른 하나가 바로 일본인 보다 2년 앞서 1895년에 정치국(丁致國)이 세운 협률사(協律舍)였다.

협률(協律)의 유래

'협률(協律)'은 이름자 그대로 '음률의 조화를 이루는' 정도의 해석으로, 이미 조선 초기 이래 장악원(掌樂院, 궁중에서 연주하는 음악과 무용에 관한 일을 담당한 관청) 소속의 협률랑(協律郞)이라는 직책이 존재하고 있었고, 구한말 협률과(協律課)가 교방사(敎坊司)로 승격되는 기사도 보이고 있다. 또 중국 청나라의 협률창희(協律唱戯)에서유래한 것이라 하기도 한다.

1902년은 고종황제 즉위 40주년이 되는 해로, 칭경(稱慶) 예식을 치르기 위해 이를 관장하는 협률사(協律司)를 뒀다. 전국의 유명한 판소리 명창과 기생 무동(舞童)등 170여명을 모아 전속단체를 조직하고 이들에게 관급을 줬는데, 흉년을 이유로 경축예식이 미루어지자 협률사(協律司)도 협률사(協律社)로 바뀌었다.

1903년에는 경영권도 정부에서 민간으로 넘어가 상업극장으로 변신했는데 공연장의 풍기문제 등의 이유로 1906년 정부로부터 폐지령을 받았다. 이후 이인직(李人稙) 등이 중심이 되어 협률사를 연희장(演戱場)으로 다시 사용하도록 정부의 인가를 얻어 1908년 원각사(圓覺社)라는 이름으로 재개관했다.

'협률'은 협률랑(協律郞), 협률과(協律課), 협률창희(協律唱戯), 협률사(協律司), 협률사(協律社) 등 그야말로 쓰임새가 다양했는데 여기에 인천의 협률'사'(協律'舍')도 한 몫 하게 되는 것이다. 반면 지금까지는 '협률사'라는 것이 부서의 이름인지, 공연장의 이름인지, 공연단체의 이름인지에 대한 판단도 애매모호한 상태로 유보돼 있다.

정치국(丁致國)과 협률사(協律舍)

인천 협률사(協律舍)에 대한 언급은 고일(高逸)의 <인천석금>(1957)과 최성연(崔聖淵)의 <개항과 양관 역정>(1959)에 근거한다. 고일에 의하면 "인천의 부호 정치국은…부산에서 인천으로 이주해와 성공한 재산가이다…그는 용동(龍洞)에 창고 같은 집을 지었다.

이것이 우리 손으로 된 최초의 극장 협률사(協律舍)이다"라 했고, 최성연 역시 "그 당대 인천의 부호 정치국 씨가 운영하던 협률사(協律舍)라는 연극장이 있었다. 협률사는 오늘의 애관(愛館)의 전신으로서, 일청전쟁 중(1894-95) 지었던 단층 창고를 연극장으로 전용하였다"라 했다.

지역사 연구에 큰 비중을 갖는 양인이 극장 협률사(協律舍)의 설립자로 모두 정치국을 지목하고 있지만, 개관 연대에 대해서는 최성연만이 '일청전쟁 중(1894-95)'에 건축한 것으로 언급했는데,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1895년을 협률사(協律舍) 개관 연도로 잡는 계기가 됐다.

정치국(丁致國, 1865. 7. 7~1924. 10). 그간 그의 활동과 관련해서는 주로 <황성신문> 1899년 2월18일자 잡보 난의 "부산항에 '사는' 정치국이…부산 경성 등지를 운행하기 위한 협동기선회사(協同汽船會社)를 설립"했다는 기사가 '유일하게' 인용돼 왔다. 그리고 이 기사로 인해, 최소한 1899년까지도 인천에 살지도 않았던 그가 "어떻게 1895년 인천 협률사를 창립했겠는가"로 많은 회의와 의문을 갖게 했던 것이다.

그러나 <매일신보> 1916년 4월27일자 <인천 신사신상(紳士紳商)> 소개호에 "…정치국은 부산에서 나서 명치 17년(1884)에 전도 희망의 큰 포부를 가지고 내인(來仁)한 이래 15년간 객주업(客主業)에 종사하더니 명치 32년(1899) 자기의 발기로 공동우선주식회사(共同郵船株式會社)를 창립하고 사장이 되어 금일까지 현직에 있다"고 소개하고 있다.

그는 인천 개항 다음 해인 1884년부터 인천에 거주했고, 자수성가해서 1899년에 부산 경성 등지를 운행하는 기선회사를 설립해 사장을 겸하는 한편 인천상업회의소 부회두(부회장)에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청일전쟁을 전후한 시기 인천은 영사관, 은행, 호텔 등이 성업하고 있어 이미 극장 경영도 가능한 상태에 도달해 있었던 것이다.

내리교회 존스 목사의 기고문 중에 보이는 '1900년 이전 2개의 극장'은 최성연이 제시한 바 있는 조선인 정치국이 1895년에 세운 협률사와 일본인이 주도한 1897년의 인천좌였다.

협률사는 인천 지역에 설립된 조선인 최초의 공연장으로 이후 <혁신단> 임성구의 제안에 따라 1912년 축항사(築港舍)라 명칭을 바뀌게 되는데 부지 48평을 가진 2층 건물의 정원 500명 규모였다. 여기에서 극작가 진우촌·함세덕, 연기자 정암, 무대장치가 원우전(元雨田) 등 기라성 같은 인천 문화계 인물들이 배출됐고 새로운 애관(愛館)극장 시대를 준비해갔던 것이다. /인천시 역사자료관 전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