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수필가

한국과 베트남은 공교롭게 현대사에서 닮은꼴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양국은 일본과 중국의 영향력을 받았던 한자 문화권 국가다. (현재는 베트남은 서구 식민지를 거치면서 한자 폐지) 또 주변 강대국에 의해 침략, 식민지배의 경험을 공유한다. 그뿐만 아니라 냉전의 희생양이 되어 남.북간 전쟁을 치룬 것도 같다. 한때 우리나라는 혈맹인 미국의 요청으로 월남전(1965-1972)에 참전했었다.

현재 베트남에는 30여개 '한국증오비'가 있다고 한다. 빈호아사 마을 위령비에는 "하늘에 닿을 죄악, 만대를 기억하리라"라고 씌어있단다. 공식적으로 한국군에 의해 희생된 민간인이 9000명이라고 알려져 놀라워한다.

물론 우리도 경험했듯이 전쟁은 자국의 무고한 국민들의 희생이 따른다. 하지만 어두운 과거에만 집착한다면 밝은 미래를 기대할 수가 없다. 예나 지금이나 국제관계는 "어제의 적이 오늘에 친구가 되고, 오늘의 친구가 내일에 적이 될 수 있다"고 한다.

사실상 국가, 이웃, 개인사이도 적대관계를 고수한다면 득보다 실이 많다. 이제 국제사회도 이념을 뛰어넘어 '전략적 동반자관계'를 심화·발전시켜 나가는 게 국익에 도움이 된다는 인식이 일반화됐다. 인간사도 적이 많은 사람은 항상 불안하고, 주위서 미움을 받고, 도와주지 않기 때문에 성공하기가 쉽지 않다.

한편 한·베 양국은 1992년 12월에 외교관계가 수립되어, 우리 기업이 많이 진출해 있고, 해마다 수출량이 증가일로에 있다. 또한 1997년부터 베트남서 방영된 한국드라마에 신세대들은 호감을 갖고, 한국 이미지 개선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게다가 김대중 전 대통령께서는 2001년 8월 방한한 쩐 득 르엉 베트남 국가주석과의 정상회담에서 "불행한 전쟁에 참여해 본의 아니게 베트남인들에게 고통을 준 데 대해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다"고 사과했다.

우리 속담에도 말 한마디에 천 냥 빚을 갚는다고 했잖은가. 어느 정치 지도자도 하기 힘든 외교적인 큰 성과였다. 따라서 과거에 대한 응어리가 조금씩 풀리고, 눈에 띄게 우호적 분위기로 바뀌었다. 그렇지만 복잡한 감정이 뒤섞여 있어, 진정한 화해가 이뤄졌다고 보는 것은 성급한 판단이다.

아직도 피해마을 사람들은 한국인에 대한 강한 반감이 여전하다고 전한다. 그러나 그들은 개방적이고 현실적이기 때문에 우리와 교류협력이 확대됨에 따라, 차츰차츰 의식의 변화를 엿볼 수가 있다. 이제 과거는 과거일 뿐 양국은 미래지향적인 새가치를 창출하여, 함께 국력을 키워 외세의 침략을 막아야한다.

베트남은 고대부터 벼 이모작으로 풍족하게 살아왔고, 또 16세기 때 일본과 함께 세계 2대 도자기 수출국으로써 고려, 조선보다 경제 선진국이었다. 현재는 석유 석탄 광물자원과 수산자원이 풍부하여, 빠른 속도로 경제성장을 이루고 있다.

특히 흥미로운 역사적 일화가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고려 초 안남국(현재 베트남) 이씨 왕조(1009-1226)가 권신(權臣)인 전씨 일족에 왕위가 찬탈되고, 왕족들이 피살당하는 난국에 화를 피하기 위해 마지막 왕자인 이용상은 측근을 데리고, 배를 타고 탈출해 망망대해를 떠돌다가, 고려국 서해안 옹진반도 화산에 도착했다.

이런 사연을 전해들은 성종은 그를 화산군(花山君)으로 봉하고, 고려 여인과 결혼을 시켜, 그 지역 땅을 식읍으로 하사하여 정착을 도왔다. 그는 원나라 침입 때 지역 주민들과 함께, 몽고군과 싸워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그가 바로 화산 이씨의 시조 이용상(李龍祥)이다. ]

이처럼 양국은 이미 오래 전부터 혈연관계가 맺어졌다. 바야흐로 국제화시대를 맞이하여, 우리나라 총각들이 베트남의 처녀들을 배필로 맞아드려 한국인의 한 가족이 되어 '사돈의 나라'로 발전해 가고 있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그들이 한국에 잘 적응하는 원인은 이러하다. 유사한 국민정서와 가족 생활상이다,

그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옛적부터 농경사회 속에서 조상과 부모를 공경하고, 예절의식을 공유하며, 젓가락 식생활 문화, 명절 첫돌 환갑잔치 고희연 등을 중시하는 등 문화적 공통점으로 인하여 충돌 없이 잘 살아간다.

요즘 신세대들은 전통이나 이념에 얽매이지 않는 것 같다. 국적불문하고 외국인 신부와 거부감 없이 혼인하여 알콩달콩 사는 것을 보면, '국가와 민족'이란 무엇인가 하는 화두(話頭)를 놓고, 미묘한 상념에 빠지게 한다. 실제로 세계는 하나의 지구촌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전쟁보다는 평화를 추구해야 인류가 공동번영을 구가할 수 있잖은가.

향후 한국은 베트남에 기술지원과 경제적 협력을 증진시켜나가고, 민간교류도 확대하여 돈독한 우의가 쌓이게 되면, 적대감이 사라지면서, 한국인의 고마움을 깊이 인식하게 될 것이다. 바라건대 다문화 1세들은 양국의 미래위해, 든든한 우정의 가교를 만들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