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우성의 인천에서 시작한 최초의 역사-40-비누
국내 최대 비누공장 '애경사' 전국시장 호황
▲ 우리나라 화장비누를 대표했던 '애경 유지'의 '미향' 비누.
그 옛날 비누가 없었을 때도 그와 유사한 세정제는 존재했다. 잿물이 그것이다. 세계 여러 나라에서 잿물을 사용한 예가 옛 사서에 등장한다. 풀잎을 태운 재를 빗물에 오래 담가 두었다가 썼는데, 잿물 외에 '조두(녹두나 팥으로 만든 가루비누)'도 사용했다.

'조두'는 신라 이후 조선 시대에도 고급 세정제로 사용되었다. 날 팥을 맷돌에 갈아 껍질을 벗겨내고 다시 곱게 갈아 체에 쳐내는 간단한 방법으로 얻었다. 얼굴에 물칠을 하고 손바닥에 팥가루를 묻혀 씻으면, 때가 빠지고 살결이 보드라워진다.('한국화장문화사' 열화당) 형편이 좋지 못한 집에서는 콩으로도 '조두'를 만들었다. 콩깍지 삶은 물이나 창포 우린 물로도 얼굴을 씻었다. 중국에서는 잿물을 풀즙과 밀가루에 섞어 굳힌 신체 사용 세정제를 '석감'이라 했다. 광복 후에도 비누를 '석감'이라 한 경우가 많았다.

석감 대신 근대적 세정제인 비누가 선을 보인 것은 개항 직후 주요 '박래품(舶來品)'의 하나로 등장한 이후의 일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언제부터 비누가 만들어졌는지는 불분명하다. 다만 1895년경 인천에서 처음 만들어졌다는 구전만이 전해질 뿐이다.

국내 최대의 비누공장이 본격적으로 가동한 것은 1912년이다. 지금의 중구 송월동에서 한 일본인이 자금 30만 원으로 차린 '애경사'가 그것이다. '애경'의 화장비누와 세탁비누는 경인 지역을 비롯해 대전ㆍ대구·목포 등지로 팔려나가 호황을 누렸다.

광복 이후 재가동을 했고, 6·25전쟁 직후인 1954년 이 공장을 인수한 채몽인 씨가 자본금 5천만 환으로 '애경유지공업(주)'를 창립해 종업원 50명과 함께 비누 제조 사업을 시작했다. 상품명은 소비자에게 친근한 이미지로 알려진 '애경(愛敬)'을 그대로 썼다.

'애경'은 폭발적인 인기를 얻어 1958년 '미향비누'만 한 달에 1백만 개를 팔아 인천ㆍ서울 간을 달리는 차량의 대부분이 '애경유지' 트럭이었다는 일화를 남겼다. 일상용품인 비누도 인천에서 처음 만들어 전국으로 확산시켜 나갔던 것이다.

그간 '인천 최초' 시리즈를 연재하면서 우리나라의 근대를 인천이 이끌어 왔음을 재삼 확인하였다. 내일의 대한민국 역시 '꿈을 지닌 도시 인천'이 당당하게 선도해 가리라 믿으며 이 연재를 마친다.

/인천시립박물관장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