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흥구 인천시의원 수필가

아침 일찍이 엄마한테 전화가 걸려왔다. 웬만해서는 전화 않는 엄마였다. 어쩌다 전화할 때란 '애비야, 고추 말려 놨으니 공일날 와서 가져가거라.' 또는 '술 조심하구, 나이 먹으면 옛날하고 달라.' 그런 종류의 전화는 종종 받지만 당신이 아프다거나, 식구라야 달랑 아버지와 단둘이 살지만 좀처럼 살림이 어렵다거나, 자식에게 걱정되는 소리를 들어 본 적이 없는데 아침부터 엄마의 힘없는 목소리였다.

'웬만하면 참아보려 했는데 한쪽다리가 퉁퉁 붓고 걸어 다닐 수도 없으니, 설 명절은 다가오는데…' 말꼬리를 흐렸다.

그날 병원에 모시고 가서 치료 받고 집에 온지 몇 시간 만에 돌아가셨단 소리를 듣고 처음에는 거짓말인줄 알았다. 그렇게 허망하게 가시다니 일흔넷이면 한창 사실 나이인데….

엊저녁 새벽녘까지 <잘 가요 엄마> 라는 책을 다 읽었다. 엄마보다 이십년을 더 산 어느 엄마의 일생을 그린 소설이다. 자전적 소설이라고 하지만 너무 처절하게 산 엄마의 삶을 치부까지 들어내며 욕되게 하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연민을 느끼면서도 이 시대 자식들의 솔직한 자화상을 되돌아보게 한 소설이었다.

엄마도 그랬다. 스무 살의 나이에 서른 노총각에게 시집갈 때는 엄마만이 갖고 있는 팍팍한 삶이 그토록 내몰았다.

사실 아버진 노총각도 아니었다. 해방 전에 이북에 올라가 그곳에 살다가 자식 하나를 둔 채 견디지 못하고 내려왔다. 이듬해 임진강 물이 녹으면 데리러 오겠다고 한 약속이 차일피일 미루다 6·25 전쟁으로 모든 걸 단념하고 엄마와 재혼한 것이다.

소설 속의 엄마는 출가하자마자 두 남자의 아내가 되어 갖은 멸시와 고난 속에서 배다른 두 형제를 키워내느라 갖은 고생을 참아가며 살았다. 엄마 또한 이북에서 자식 하나 낳고 본처까지 있다는 사실을 알고도 결혼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재취해 간 외할머니 때문이었다. 그 애옥살이가 오죽했으면 그랬을까?

그러나 괴나리봇짐 하나 들고 나온 남편 하나 믿고 우리 오형제를 키웠다. 염부 꾼인 아버지대신 엄마는 봄부터 가을까지 들판에서 줄곧 살았다. 세살터울의 고만고만한 자식들을 전부 데리고 일을 할 수 없을 때는 그늘 밑에 있는 나무에 포대기 끈으로 하나 둘씩 묶어놓고 먼빛으로 넘보며 일하기도 했다고 한다.

아버지가 작은 초가집을 마련할 때까지 그 드난살이와 애들이 배고프다고 하면 동네 메주 쑤는 집을 알아내어 절구에 찧어주고 그 대가로 메주를 걷어다 먹이기도 했다. 그런 엄마를 두고 동네 사람들은 곧잘 '네 엄만 체수는 작지만 동네 품앗이는 도맡아서 했다'는 소리가 지금도 가슴을 친다.

얼마나 아프셨을까? 아프다고 말씀을 하시던가. 며칠이라도 방에 누워 계시던지, 오죽 참기 어려웠으면 병원에 가자고 한 날, 그 날 돌아가시다니….

마지막으로 어머니 유품을 정리했다. 낡은 비닐핸드백 속에서, 당신이 덮고 자는 이불 밑에서, 장롱 속 깊숙이 양단 저고리 속에서 적지 않은 돈이 나왔다. 자식들이 때 되면 준 돈들이다. 꼬깃꼬깃 말아둔 돈은 필시 며칠 안 남은 설날에 손주들 세뱃돈 을 주려고 한품두푼 모아둔 돈 들일 텐데… .

그 돈으로 약을 사 드시던지, 병원에라도 다니실 것이지 어디다 쓰려고 그 돈을 모아두셨단 말인가!

엄마의 유품을 태우면서 <잘 가요 엄마> 하며 하염없이 허공에다 눈물을 뿌려대고 있었다. /황흥구 인천시의원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