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정체성 찾기] 이영태의 한시로 읽는 인천 옛모습
37>이규보와 계양
▲ '요우 제군과 명월사에서 놀다(與寮友諸君 遊明月寺)'
이규보는 <공청에서 퇴근하여 아무 일 없다(退公無一事)>라는 시문에서 “우스워라 잔성을 지키는 사람, 벼슬을 탐내어 물러갈 줄 모르네(笑矣殘城守, 貪官莫退休)”라고 했다. 서울과 떨어져 있는 자신을 죄인[囚人]이라 칭하고 선정을 베풀어야 할 계양을 ‘잔성’이라 여겼던 작자였기에 ‘벼슬을 탐내어 물러갈 줄 모르네’는 단순히 탐관(貪官)으로 읽어야 할 부분이다.

천명을 운운하면서 마음 한쪽에서는 계양부사이되 그것을 죄인으로 여기며 임금을 향한 짝사랑을 진술하고 있었기에 이런 판단도 크게 어긋나지는 않는 듯하다. 작자를 ‘어용문인’으로 평가할 수 있었던 것도 계양 관련 시문에 남겼던 표현과 무관하지 않다.

하지만 ‘탐관’은 탐관오리(貪官汚吏)나 탐관활리(貪官猾吏)처럼 개인의 이득을 위해 관직을 탐하는 자를 지칭하는 것이지만, 이규보의 또 다른 계양시문을 통해 보건대 탐관의 목적이 다른 데 있었다.

<승선 김양경이 안렴사 진식에게 화답한 시에 차운하다(次韻金承宣良鏡和陳按廉湜)>
功高塞北官宜貴(공고새북관의귀) 공은 북쪽 변방에 높아 벼슬 귀함이 마땅하고
身在王前道可陳(신재왕전도가진) 몸이 왕 앞에 있으니 도를 진언하시겠네
若對天顔淸讌問(약대천안청연문) 임금님 뵙고 맑은 잔치에 말 묻는다면
莫忘同甲一窮人(막망동갑일궁인) 동갑 중에 한 궁한 사람 잊지를 마오

<요우 제군과 명월사에서 놀다(與寮友諸君 遊明月寺)>
飢虎爾莫嗥(기호이막호) 주린 호랑이 너는 으르렁대지 말라
忠信吾是仗(충신오시장) 나의 소신은 충과 신뿐이란다
木末得招提(목말득초제) 나무 끝에 아련히 절이 서 있고
架屋依巖嶂(가옥의암장) 가옥은 암벽을 의지하고 있네

<공청에서 퇴근하여 아무 일 없다(退公無一事)>에서 ‘탐관’은 개인 영달을 위한 욕구와 거리가 있다. 무엇보다 ‘나의 소신은 충과 신뿐이란다(忠信吾是仗)’는 진술로 보아 탐관의 궁극적 목적은 ‘충과 신’이었다. 그리고 ‘충과 신’의 방법은 <승선 김양경이 안렴사 진식에게 화답한 시에 차운하다>에 나타나 있듯이, 왕의 앞에서 ‘도를 진언하(王前道可陳)’는 것이다. 여기서의 ‘도’는 ‘치도(治道)’를 의미한다. 이규보에게 치도는 무사(武士)로서의 치도가 아니라 문사(文士)로서 가장 잘 할 수 있는 ‘위국문장(爲國文章)’이었다.

이규보 스스로 벼슬해야 할 이유에 대해 “대게 마음에 배운 바를 장차 정치에 베풀며 경국제세(經國濟世)의 방책을 떨치고 힘을 왕실에 베풀어 이름을 백세(百世)에 날려서 길이 남기를 기약하려는 것(蓋將以所學於心者 施於有政 振經濟之策 宣力王室 垂名於百世)”이라 밝힌 점을 염두에 두면, ‘탐관’은 개인의 영달을 위한 게 아니라 ‘치도’에 자신을 힘을 보태는 자신만의 방법이었다. 흔히 역사학자 이우성이 “그의 시와 산문의 대부분은 긴박한 국난의 극복과 초조한 민심의 위무에 관한 것(��한국의 역사상��)”이었다고 하거나, 한문학자 김영이 “이규보에게 있어서 시문은 爲國文章의 중요한 수단이었을 뿐만 아니라 이렇게 어려운 현실 상황 속에서는 자기 구원의 훌륭한 통로였다(��한국한문학의 현재적 의미��)”는 지적에서도 이런 면을 확인할 수 있다.

탐관의 목적이 왕의 앞에서 ‘도를 진언하(王前道可陳)’는 것과 밀접하고 그것의 한 방편이 ‘위국문장(爲國文章)’이라 할 때, 서울과 거리를 둔 계양에 있던 이규보에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도를 진언(王前道可陳)’할 수 없는 상황 자체가 자신을 죄인[囚人]으로 인식하게 했던 것이다.

임금의 주변에서 도(道)를 진언할 수 없는 처지를 어느 정도 받아들인 후, 그의 눈에 포착된 것은 계양 주민들의 삶이었다. 계양 주민의 삶이 시문의 소재로 등장하기 시작했는데, 이 또한 작게 시작하는 치도의 한 방법이었다.

/인천개항장연구소 대표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