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정체성 찾기] 강옥엽의 '인천 역사 원류'를 찾아서
37> 또 하나의 인천 가치, 정려각(旌閭閣)
▲ 이윤생과 강씨 정려


2015년 인천이 지향하는 가치는 비류의 미추홀 정착으로부터 오늘날의 인천광역시에 이르기까지 2030년이라는 오랜 역사의 흐름 속에서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인천 역사를 구성하고 있는 수많은 구슬들을 몇 가지 특징으로 꿰매야만 발견되는 그 가치로부터 창조도 생성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정려'는 인천의 정신적 기반을 이루는 또 하나의 유산이다.

정신적 유산, 정려

정려(旌閭)란 효자나 열녀, 충신 등의 행적을 높이 기리기 위해 그들이 살던 집 앞에 문(門)을 세우거나 마을 입구에 작은 정각(旌閣)을 세워 기념하는 것을 말하는데 '정문(旌門)'. '정표(旌表)'라고도 한다. 건물이 아닌 문을 세우게 되면 정려문이고 건물을 세우게 되면 정려각이 된다. 또 건립된 기준이 효녀나 정절을 지킨 정절녀인 경우 열녀문, 열녀각이 되고, 일반적으로는 그냥 정려문, 정려각 이라 칭한다.

정려를 받는 과정은 그 고을의 관청이나 조선시대의 유학자들, 혹은 정려를 받으려는 사람의 후손이 신청하는데, 중앙의 예조라는 행정기관에 신청을 하게 되고 이를 인정을 받아 임금의 명으로 허락이 되면 '명정(命旌)'을 받는다. 즉, 임금이 명하는 정려란 뜻이다. 따라서 정려를 받는 건 그 사람의 집안뿐만 아니라 그 마을의 경사이다. 또한 국가에서 세금이나 군역의 면제, 경우에 따라서는 관직도 수여가 된다. 전근대는 유교를 통치수단으로 했기에 정려는 효(孝), 충(忠) 등을 장려하고 이를 시각적으로 사람들에게 보임으로써 이상적인 유교사회를 만들고자 하는 목적이 담긴 것이었다.

1983년 국가에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전국에 모두 4362개의 정려가 있는데 비석으로 된 것이 전체의 45%인 1968개로 나타나고 있다. 비석을 세우고 건물을 지은 것이 962개, 건물만 지은 것이 595개, 문으로 된 것이 563개, 나무판에 기록만 있는 것이 268개, 나머지 기타 32개로 조사됐다. 건물은 대개가 단 칸짜리이지만, 경북 달성에 있는 현풍곽씨 정려각은 12칸이나 된다. 시대별로 보면 고려시대 것이 34개, 조선시대가 1871개, 일제강점기가 859개, 광복 이후에 세운 것이 1588개로 나타나고 있어 전근대사회만이 아니라 근현대에도 충효는 인간의 의리와 기본적 도리로써 그 중요성과 과제가 변함이 없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인천의 정려

▲ 이찰, 이율형제 정려

인천지역에 남아 있는 정려 중 현재 시 문화재(기념물)로 지정된 것은 남구에 소재한 이윤생과 부인 강씨 정려, 그리고 계양구에 있는 이찰, 이율형제 정려 2점이다. 그러나 서구 대곡동 두밀마을 초입에 있는 밀양당씨 정려각처럼 문화재는 아니지만 아직 남아 있는 사례도 있다. 현대에 와서 도시화와 개발사업에 밀려 이런 자료들은 부지불식간에 급속히 사라질 수밖에 없는데, '인천 충효록'과 '대한노인회 인천연합회' 에서 1986년 경 조사한 내용을 보면, 30년 전 인천에는 충신, 공신, 효자, 효부, 열녀, 열사, 지사 등 76명과 관련된 정려들이 있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조선시대 이윤생(1604~1637)은 인천에서 대대로 살아온 부평이씨 후손으로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아 원도(猿島)에 들어가 강화와 남한산성에 이르는 통로를 차단하고 청군(淸軍)에 대항하지만 결국 의병과 함께 최후를 마쳤다. 부인 강씨는 부군의 전사소식을 듣자 바다에 몸을 던져 의절(義節)하였다. 224년만인 1861년(철종 12) 정려가 내려졌고 이윤생은 좌승지에, 강씨 부인은 숙부인에 추증됐다. 현재 남구 용현동에 위치한 정려각은 1990년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4호로 지정됐는데, 각(閣) 내부에 편액이 좌우로 나란히 걸려 있다. 이찰, 이율형제는 세종대왕의 아들인 임영대군의 후손으로 광해군때 부평 갈월리(갈산동)에서 살았는데, 병든 부모를 지극정성으로 보살폈고 돌아가신 후에도 각각 3년간의 시묘살이에 정성을 다했다. 마을사람들이 상소해 1670년(현종11년) 정려가 내려졌다. 2004년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52호로 지정됐고, 계양구 갈현동 선영 앞 정려각에 편액이 보관돼 있다.

인천 여성과 정려

일반적으로 정려라 하면 주로 전근대시기 여성들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당시 정려 사례를 추출할 수 있는 자료로는 <지리지> 인물조나 <조선왕조실록> 등이 활용되는데, 신분별로는 거의 양반사족의 부녀자들의 사례가 나타나고 서민, 비(婢), 양반의 첩(妾) 등이 부분적으로 찾아진다. 이를 통해 추출되는 조선시대 인천 여성 인물은 총 129명인데, 강화(106명), 교동과 부평(각 8명), 인천(7명)으로 분류해 볼 수 있다. 강화지역의 여성 인물이 전체의 82%로 유독 많았던 까닭은 병자호란(1636) 때문이었다. 당시 양반사족들이 가솔을 이끌고 '보장지처'로 여긴 강화로 대거 피란해 왔고, 마침내 강화가 적병에게 함락되기에 이르자 치욕을 당하지 않기 위해 자결한 열녀(절부)들이 많았던 것이다.

그들에게 정려가 내려지는 내용을 보면, 아픈 부모를 봉양하기 위해 어린 자식에게 줄 젖조차 아비에게 봉양하다보니 자식이 굶주려 죽거나, 병든 어머니를 소생시키기 위해 단지(斷指)하거나, 가묘(家廟)와 사당을 불속에서 지키기 위해 신주를 안고 죽음을 맞이했다. 대개 남편이 죽으면 이윤생 부인 강씨처럼 함께 자결하거나 종신토록 고기 등 맛난 음식을 먹지 않았다. 그리고 순조 때 판서를 지낸 충민공 민성(閔垶) 집안의 여인들처럼 국가가 병자호란 등의 변란을 당하자 절의를 지키기 위해 한 집안 여성 13명이 모두 자결하는 사례 등도 있다.

충효의 현재적 의미

지금도 효부, 효자 등을 기려 국가나 지자체에서 포상을 하고 있지만, 최근 우리 사회 일각에 나타나는 패륜, 가족애 부재, 도덕부재의 병적인 현상들을 보면서 걱정과 우려의 목소리가 많다. 효와 열(또는 節)이 유교체제에서 지나치게 강조된 면이 있지만, 시대와 환경이 바뀌어도 인간의 기본적인 도리임에는 변함이 없다. 물론, 그 적용에 따른 방법론은 현 시대에 맞게 융통성을 필요로 할 것이다. 매년 맞이하는 어버이날이지만, 인천의 가치 재창조를 지향하는 2015년 5월, 인천에 남아 있는 '정려'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다시 한번 우리 사회의 기본이 무엇인지 그 정신적 가치를 다시금 발견하는 계기가 돼야 할 것 같다.

/인천시 역사자료관 전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