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정체성 찾기] 강덕우의 '인천 역사 원류'를 찾아서
(36) 독립운동가 만오 홍진(洪震)과 인천
▲ 만오 홍진 선생 영정.

<대중일보> 1946년 9월14일자에 의하면, "비상국민회의의장 고 홍진씨 영결식은 13일 상오 9시30분부터 서울 천주교 강당에서 이승만 박사와 김구 등 조객 다수 참석하에 엄숙한 가운데 성대히 거행되었다.

먼저 묵상 등 의식이 있은 뒤 김구의 조사에 이어 조소앙(趙素昻)의 약력보고, 김명균(金明均)의 헌화, 최동오(崔東旿)의 제문 낭독…이어 각 대표와 친척의 소향(燒香)으로 10시30분 식을 종료하고 정오 장지인 인천으로 운구하였다."고 하여 선생의 영결식이 이승만, 김구 등 임정 요인들의 주도에 의해 성대히 치러졌고 장지인 인천으로 운구됐음을 알리고 있다.

선생의 탄생과 활동

홍진(洪震, 1877.8.27~1946.9.9)은 부산 개항 직후인 1877년 8월27일 서울 차동(車洞, 현재의 서소문)에서 조선후기 고위직 관리를 가장 많이 배출한 명문가 사대부 집안이었던 풍산홍씨(豊山洪氏) 재식(在植)과 청주한씨(淸州韓氏) 수동(壽東) 사이의 3형제 가운데 차남으로 출생했다. 본적은 충북 영동군 영동읍 계산리로 처음 이름은 면희(冕熹)였으나 중국으로 망명하면서 홍진으로 바꾸었고, 만오(晩悟)와 만호(晩湖)라는 호를 사용했다.

3·1운동이 발발했을 때 선생은 독립을 선언한 이후를 준비하는 활동에 참여했다. 1919년 3월17일 홍진은 기독교 전도사 이규갑(李奎甲) 등과 함께 동료 검사 한성오(韓聖五)의 집에서 회합해 '한성정부(漢城政府)'를 조직하고 4월2일에는 인천 만국공원(萬國公園)에서 13도 대표자대회를 열어 임시정부의 수립을 선포하고 정부 조직을 결정했다.

그리고 서울에서 4월23일 국민대회를 개최해 한성정부의 수립을 대내외에 선포하기로 결의했다. 그가 대회장소로 서울이 아닌 인천을 택한 것은 일제의 감시를 피할 수 있는 곳이 필요했기도 했지만, 일제강점기전까지 외국의 조계들이 밀집했던 '만국공원'의 국제적 상징성을 감안했던 것으로 보인다. 돌이켜보면 인천에 선생의 선영(先塋)이 있었던 것도 한 요인으로 작용했을 법도 하다.

선생은 이 같은 사실을 국외 각 지역에 알리기 위해 4월8일 정부 조직표와 조각 명단을 휴대하고 상해(上海)로 망명했다. 선생을 통해 국내의 임시정부 수립 사실을 알게 된 상해의 독립운동자들은 이에 자극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조직에 박차를 가하게 됐다. 그리고 상해임시정부에 참여한 이후 3번에 걸쳐 임시의정원 의장을 맡았는데, 좌우 독립운동 세력 모두에게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광복 후 선생은 1945년 12월2일 임정(臨政) 요인의 제2차 환국때에 광복의 환희와 자주적 민족국가 건설의 희망을 안고 귀국했다. 하지만 귀국 직후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신탁통치안이 결의되자, 선생은 민족 자주성의 수호를 위해 반탁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리하여 1946년 2월 전국적 반탁운동 단체인 비상국민회의 의장으로 선출돼 반탁운동과 건국 사업에 혼신의 노력을 경주하던 중 9월9일 70세의 일기로 서거했다.

선생과 인천

<대중일보> 9월15일자에 의하면 "9일 장서(長逝)한 비상국민회의장 만오 고 홍진선생의 장례식은 13일 하오 3시부터 시내 문학동 고인 선영에서 거행되었다.…이날 서울 천주교회당에서 영결식을 마친 장열은 하오 2시15분 고인의 선영인 문학동 동구에 경위단(警衛團)을 선두로 고인의 유해를 실은 영구차가 도달하였다.…그 덕행을 추모하는 수백의 동리 사람들이 길가에서 엄숙히 고개숙여 영구를 맞이하는 가운데 장의행렬은 2시45분 드디어 선산에 무사히 도착하였다.

즉시 장의절차로 들어가 장의위원장 김구 주석 이하 부위원장 최동오, 김명준(金明濬)씨의 집행하에 유림(柳林), 유동렬(柳東烈), 김상덕(金尙德)씨 등 각 임정 요인의 배례식과 이어 任 인천시장, 方 인천지청 판사, 尹 인천서장, 表 항무청장, 姜 부천군수 등의 배례가 있었다. 이어 각 단체의 배례식이 끝나자 정각 하오 3시 하관식을 거행하였다."고 하여 김구 이하 임정요인들이 선생의 선영인 인천 '문학동 선산'에서 하관식을 거행했음을 전하고 있다.

선생의 선영이 인천이었기 때문에 '문학동 선산'에서 장례식을 거행했지만 그 위치에 대해서는 현재까지 알려져 있지 않는 안타까움이 있다. 이와 관련하여 1924년생으로 1949년 4월부터 인천소년형무소에서 교도관으로 근무했던 홍종식옹의 구술에 의하면 "…지금 정자가 있는 연경산이 있지요? 거기가 독립운동가인 홍진 선생 가문의 선산이었어요. 홍진 선생의 6대조 할아버지가 조선시대 중엽 이조참의를 지냈는데, 그분의 묘를 세우고 비석을 크게 세웠지요. 그러나 그게 고속도로를 만들면서 땅 속에 묻혀버렸어요….(<남구 사람들의 삶과 일>, 남구학산문화원, 2006)"라고 밝혀 문학산의 연경산에 선생의 선영이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선생의 묘비

1962년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84년 12월15일 선생의 묘는 인천에서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 애국지사 묘역으로 이장했고 1994년 10월6일 동작동 국립묘지 임정요인 묘역 내 임정수반 묘소로 다시 천장했다. 선생의 묘비는 1984년 선생의 묘소가 인천에서 국립묘지로 이장됨에 따라 인천광역시립 박물관으로 옮겨졌는데, 당시 손자 홍석주(국외거주)를 수소문해 기증받았다고 전하고 있다. 묘비는 높이 65㎝, 너비 40㎝의 대리석으로 만들어졌고, 화강암을 이용해 단을 설치했다.

묘비의 정면에는 "故晩悟洪辰先生之墓 大韓民國二十八年十一月九日建立"라고 쓰여 있는데, 3·1운동과 임시정부가 수립된 1919년은 대한민국 원년이 되는 해로, '대한민국 28년'은 1946년을 뜻한다. 그리고 묘비 아래의 화강암 단에는 "靑年 同胞여 病든 나라를 고치는 病院의 일꾼이 되자"라는 1931년 길림(吉林)에서 선생이 남긴 글이 새겨져 있다.

인천은 선생의 선영이 있던 곳으로 선생이 영면했던 곳이었다. 또한 3·1운동 당시 13도 대표자대회를 열고 정부 조직을 결정했던 도시였다.

선생의 생애는 일제 강점기 내내 망명한 독립운동가로서의 삶을 살았고 광복 후 이념대립 문제 해결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을 전개했지만, 그 뜻을 펴기 전 환국 9개월여 만에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인천과의 연고나 왕래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확인하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지만, 선생의 묘비는 선생의 생애와 인천과의 인연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유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인천시 역사자료관 전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