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정체성 찾기] 이영태의 한시로 읽는 인천 옛모습
(36)이규보와 계양
▲ '공청에서 퇴근하여 아무 일 없다(退公無一事)'

이규보는 2,088수 가량의 시문을 남겼다. 이 중에서 절반을 강화도에서 지었다고 한다. 하지만 현전하는 작품 이외의 것이 훨씬 많았다는 것은 ��동국이상국전집��의 서문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예컨대 "만분의 일쯤 주워 모았다(收拾萬分之一)"는 게 그것이다. 작품의 수와 함께 "우리나라 한문학사상 최치원·고려의 이제현·조선시대의 신위 등과 같이 최고급 시인(문선규, ��한국한문학��)"이자 "고려 제일인자(김동욱, ��국문학사��)"라는 평가를 통해 당대의 대표적 문인이란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규보는 13개월 동안 계양부사로 있었다. 그곳의 생활을 귀양(謫)으로 받아들였기에 자신을 '수인(囚人, 죄인)'으로 표현했다.
 
 <통판 정군에게 보이다(示通判鄭君)>
 江南地僻作孤囚(강남지벽작고수) 강의 남쪽 벽지에 외로운 죄인 되어
 猶似籠禽不自由(유사롱금불자유) 갇힌 새 자유롭지 못함과 같네
 嵐瘴熏人顔漸黑(남장훈인안점흑) 남장이 훈증(熏蒸)하여 얼굴 점점 검어지니
 相逢應愧舊交遊(상봉응괴구교유) 옛 친구 만나면 부끄럽겠네

 
작자는 계양을 벽지[地僻]로, 자신을 외로운 죄인(孤囚)이라 지칭한다. 그에 따라 자신을 '갇힌 새 자유롭지 못함과 같'다고 생각했다. 계양 도착시기부터 일관되게 자신을 '유배[謫]'와 관계시켰던 만큼 '죄인[囚]'도 그것의 연장에 있다. 예컨대 퇴근한 후 한가한 처지를 "백수로 외로운 죄인과 같(白首若孤囚)"다 하거나, 수량사의 누각에서 놀면서 "즐거워라 죄인이 풀려난 것 같다(軒然似脫囚)"고 하는 데에서 이런 면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남편을 보러 계양까지 왔던 부인이 서울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고 "난 죄인 같다(嬭無拘迫我如囚)"며 자신의 처지를 표현한 것도 마찬가지 경우이다.

얼굴빛이 검어진다는 것은 물을 갈아먹거나 혹운 섭생을 달리 하여 생기는 일시적인 몸의 반응일 텐데, 작자는 거기에 의미를 부여한다. 계양부사의 소임을 맡고 있되 딱히 마음이 편하지 않은 마당에 마침 얼굴빛이 약간 변하자 그것을 죄인들의 안색으로 이해하고 싶었던 것이다.
 
다음은 퇴근 후 자신의 소회를 읊은 것이다.
 
 <공청에서 퇴근하여 아무 일 없다(退公無一事)>
 退公無一事(퇴공무일사) 퇴근하여 일 없으니
 白首若孤囚(백수약고수) 백수로 외로이 갇힘과 같네
 未識邦侯樂(미식방후악) 벼슬의 즐거움 알지 못하고
 空思法從遊(공사법종유) 부질없이 임금 뒤따른 것만 생각하네
 朝廷天共遠(조정천공원) 조정은 하늘과 함께 멀기만 한데
 日月水同流(일월수동류) 해와 달은 물 따라 흐르네
 笑矣殘城守(소의잔성수) 우스워라 잔성을 지키는 사람
 貪官莫退休(탐관막퇴휴) 벼슬을 탐내어 물러갈 줄 모르네

 
작자에게 퇴근 후의 생활은 '백수로 외로운 죄인과 같'아서 계양부사라는 벼슬도 즐겁지 못하다. 자신의 몸은 계양에 있지만 마음은 여전히 서울(조정)에 머물러 있다. 자신의 나이를 생각하니 물처럼 지나는 세월이 야속하기만 하다. 이런 상황은 세월과 더불어 계속될 듯하고 자신은 여전히 계양을 지켜야 할 처지이다. 그런 생각을 하는 작자에게 계양은 잔성(殘城, 쇠잔한 성)으로 인식될 수밖에 없었다. /인천개항장연구소 대표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