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균 시인
어쩌다 TV에 눈을 주니 비중 있는 프로그램으로 '불후의 명곡'이라는 대중가요를 리메이크하여 부르는 시간이 있다. 무엇이 '불후(不朽)'인지는 모르지만 일명 히트한 노래로 오래된 듯한 노래만을 모아 젊은 가수들이 자기만의 창법으로 부르는 그런 프로그램인 것 같다. 죽지도 않았는데 '불후'라는 것도 가당치 않지만 오래 남을 노래도 아니건만 불후는 무슨 놈의 불후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춘추시대에 나온 <춘추좌전> 양공24년조에 전하는 이야기론 덕을 쌓는 '입덕(立德)' 공을 세우는 '입공(立功)', 문장을 남기는 '입언(立言)'의 세가지를 삼립(三立)이라 하여 '삼불후(三不朽)'라 하였다. 조상 대대로 귀족이고 집안의 대를 이어 현달하고 제사가 끊이지 않았다하여 죽어서 오래 남는 것이 아니고 바로 이 삼립을 하는 것이 불후라는 것이다. 죽어서 오래 남는 덕을 쌓거나 공을 세우는 일이 천운이 받혀주지 못하면 이룰 수 없는 일이지만 입언은 하고자 하는 의지만 있으면 가능한 일로 쉽고도 어려운 일이라 하겠다.

입덕과 입공을 한 사람들을 꼽아보자면 중국역사 5000년을 따져봐도 우왕, 주공, 공자 등 몇 사람에 불과하지만 입언한 사람으로는 노자, 장자, 맹자, 관중, 손자, 사마천 등 불후의 작품을 남긴 적잖은 인물들이 있다. <논어> '위령공'에 고한 공자는 "군자는 죽어 세상에 이름을 남기지 못할까 걱정한다" 했으니 세상에 이름을 남기는 방법으로 글쓰기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지금도 그렇지만 옛날 글 꽤나 안다는 선비들이 개인 문집을 앞 다투어 남기는 것이 그러했고 글쓰기가 욕망의 발현이라는 점에서는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어떻게 쓰는가 하는 문제는 결국 무엇을 쓸 것이냐는 관점의 문제'이며 '새로운 사상은 언제나 새로운 글쓰기를 싣고 온다'는 것과 글의 모범이 있다면 느낌의 모범, 혹은 정서의 모범도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염두해 두고 붓 끝에 혀가 달려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남보다 우월성과 이기심을 가지고 사후에 기억되길 원하는 사람들로 사업가, 법조인, 군인등 최상층(?)이 주로 나타나는 유형이 있는가하면 미학적 열정으로 세상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사람들로 기행문을 쓰는 여행가가 있다. 반면 역사적 충동을 느끼며 진실을 밝혀 후세에 전하려는 기자나 다큐멘터리 작가 그리고 정치적 목적으로 글쓰기를 통하여 남의 생각을 바꾸고 세상을 끌고 가려는 욕망으로 신문의 칼럼이나 평론등을 쓰는 네가지의 유형을 <1984년>의 작가 조지오웰은 '나는 왜 쓰는가'라는 에세이에서 언급했다. 글쓰는 욕망이 조지오웰의 말처럼 되는 것은 아니지만 글쓰기에 앞서 '나는 왜 쓰는가'에 대한 분명한 인식을 가져야 한다.

무엇을 말 할 것인가에 대한 의식이 없이 쓰는 것은 목적없이 삶을 사는 것처럼 공허하기만 하다. 목적이 있을 때 글의 주제가 명료해지며 생각쓰기에 도달하는 것이다. 언덕의 절개지 지붕 얕은 집의 담을 넘어 핀 산수유가 샛노랗다. 이 봄이면 글쓰기 대회가 꽃처럼 만발할 것이다. 각 도서관이나 문화원에서는 창작 교실을 운영하며 사람들을 모을 것이다. 입언하니 불후를 낳겠고 자아를 깨우니 뒤 돌아볼 여유가 있어 정말 좋겠다마는 진정한 글쓰기가 이뤄지는 대회와 창작교실이 되었으면 좋겠다. '시대를 아파하고 세속을 분개하는 내용이 아니면 시가 아니다'라고 한 다산 정약용의 말을 꼭 따를 수 는 없지만 패관잡설을 피하고 '글의 모범'이 있다면 '느낌의 모범' 혹은 '정서의 모범'을 찾아 생각을 정리하고 써야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