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균 시인
입춘이 지나도 춥다. '입춘에 물독 얼어터진다'는 옛말을 대변하듯 춥다. 이 마지막 춘 날 <청구영언>에 수록된 황진이의 시조 한 수 생각난다. '동짓날 기나긴 밤을 한허리 버혀내어 / 춘풍 니불 아래 서리서리 버헛다가 / 어른님 오신 날 밤이여든 구뷔구뷔 펴리라.'

연모하는 사람을 두고 오매불망 착상이 어울어진 표현의 백미다. 이 겨울밤의 창연체하(愴然涕下) 스러움이 또 넘친다. 명절날 그리고 우수가 지나면 샛노란 산수유 피는 봄, 창밖으로 무엇이 보이냐고 묻고 싶은 봄, 대답은 하나같이 상상이 시들어버린 답변 뿐 원하는 대답은 없다. 잠자던 나뭇가지에 연두색 편지를 달고 웃고 있는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니 마음의 눈은 어딜 갔는지 모를 일이다. 어느새 우리는 회색 도시의 그늘에서 톱니처럼 돌고 있는 일상의 부품에 자나지 않으니 상상의 날개를 단 감수성의 촉수를 잃어버림이 당연한 일 일게다. 강산이 수 백번 바뀐 그 시절의 황진이는, 주물적 사고에 젖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 크다. 조선의 기녀로서 참아내야 할 일도 많았겠지만 당대의 사대부들을 오연히 바라보며 갈 길을 제대로 간 여장부다.

기녀로서의 애환을 떨치며 내공을 다스리며 고양된 감수성과 활달한 상상력의 부양, 우리세대가 놓쳐버린 것을 다 가지고 있는 그가 아닌가. 우리는 새 소망을 찾기가 어느 부면을 돌아보아도 어렵다. 도덕성이 땅에 떨어져 있고 남을 이기지 못하면 내가 죽는다는 절박함 뒤 배려는 없다. 정치와 사회는 실종되고 젊은이들의 방황은 언제 끝날지 모르는 혼돈의 시대, 언어도단(言語道斷)의 지경, 심행처(心行處)를 찾아가는 여유를 구하는 것이 우선순위인 것 같다. 전란의 소용돌이를 벗어나는 60년대 <무진기행>의 김승옥은 우리에게 '감수성의 혁명'을 부르짖었다. 생존의 문제로부터 심경의 문제로 바뀌는 기회를 주고자 했다. <지성과 사랑>의 헤르만 헤세는 이성과 감성의 조화를 탐색했고 감수성이 강한자가 사리분별이 깊다 할 수 만은 없다고 한 발자크, 허나 헐벗은 겨울나무가 수다를 떨며 몸끼리 부딪히는 나뭇잎의 분주함을 닮아가는 일탈의 상상력 없이는 높은 지식과 제도 그 무엇도 고착과 퇴행의 관성을 벗어나지 못한다. 시대정신의 새로움, 새로운 세대가 공감하는 반응은 이성논리에 있는 것이 아니고 감성적 체현에 있는 것 아니겠는가.

유년의 시절로 돌아가 생각해 보자. '어린왕자'가 어쩔 수 없이 내린 사막이 아름답다고 한 것은 왜일까. 사막 어딘가에 있을 것 같은 우물이 숨어 있기 때문이며 혹독한 추위를 아랑곳 하지 않고 뛰어 놀 수 있는 것은 곧 봄이 오고 봄이 오면 꽃이 핀다는 예단의 확신 때문이다. '계절의 나팔소리 오 바람이여, 겨울이 오면 봄도 멀지 않으리' 라고 노래한 셀리의 시와 '이 겨울 한복판에서 나의 가슴속에 불굴의 여름이 있음을 안다.'고 예견한 수필 '여름'에서 알베르 카뮈는 노래하지 않았나 한다.

차마 피눈물을 흘릴지언정 입 밖으로 말을 토해낼 수 없는 세태를 치유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결코 먼 곳에 있지도 않고 눈 발치에 있으며 힘겨운 자리에 있지도 않다. 생각을 바꾸고 마음의 빛깔을 어둠에서 밝음으로 바꾸면 불가능이 가능으로 지옥이 천국으로 바뀌는 명약관화한 이치, 각자의 속 깊은 곳에서 새로운 감수성의 변화를 찾는 노력을 할 때가 지금이다. 저마다의 선 자리에서 만족하며 훈훈한 입김으로 이웃을 이 마지막 추위에서 녹여준다면 가장 복된 일 아니라고 누가 부정할까.

가부장적 사회에서 사대부들의 희희농락을 견디며 절개를 지킨 기녀 시인은 아랑곳 하지 않고 처연히 갈 길을 걸어 외형적 조건을 시적 감성으로 승화했다. 그 여정을 따라 흉내라도 내보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