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용석 농협중앙회 창녕교육원 교수
대나무의 마디처럼 한 해가 시작되는 시점이면 누구나 어김없이 알찬 계획을 세우고 싶어 한다. 그래서 지난해처럼 일, 월, 분기 등 시간계획을 나름 잘 짜는 이들이 있는 반면에, 늘 새해 계획을 세울 때면 만족감보다 아쉬움을 더 많이 느끼는 사람도 많다.

하루 24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진다. 하지만 누군가는 시간을 잘 활용한 탓에 행복해지는가하면 누군가는 지나온 시간을 후회한다. 어쩌면 잘못 보낸 시간들로 지금 이 순간이 고통스럽고 벗어나고 싶을지도 모른다. 왜 그럴까? 그건 시간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간을 정복한 남자 류비셰프>라는 책속 인물 류비셰프는 철저한 시간관리와 왕성한 지적호기심으로, 생전에 70권의 학술서적을 발표하고, 총 1만2500여장에 달하는 논문과 연구자료를 남겼다고 한다.
류비셰프는 어떻게 시간을 정복할 수 있었을까? 그는 시간활용법에 대한 고민에 앞서 시간에 대한 철학을 가지고 있었다.

철학의 출발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한다. 왜 진작 시간이 무엇인가에 대한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아마 그 이유는 오늘날 현대인들 대부분이 누구보다도 그리고 어느 세대보다 하루 온종일 눈코 뜰 새 없이 더 분주하게 사는 탓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의 근본에서 점점 더 멀어졌다. 왜 사는가에 대한 진지한 물음의 시간을 가질 여유가 없는 탓이다.

이 순간만이라도 '시간은 무엇인가?'를 생각해보자. 우선 사전을 검색하면 '1. 어떤 시각과 시각과의 사이 2. [같은 말] 시각'이라고 나온다. 그래서 시각이란 단어를 찾아보면 '시간의 어느 한 시점'이란다. 늘 느끼는 것이지만 사전을 통해 낱말의 정의를 이해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마치 용어정리는 다람쥐 쳇바퀴 돌 듯 그 말이 그 말인 것 같다. 시간이 무엇인지 철학자들의 말을 빌려보자. 고대, 중세, 근대(현대)라는 시계열적으로 시간에 대한 정의를 살펴보면, 먼저 고대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시간을 '이전과 이후라는 관점에서 보여 진 운동의 수'라고 말했다.

운동하는 모든 것은 시간 속에 있고, 운동의 수는 셈을 할 수 있는 인간의 영혼과 관계되어 있다고 보았다. 중세 신학자이자 철학자 어거스틴은 시간을 신이라는 영원과 대비한다. 시간은 피조물에서만 볼 수 있는 양식이며, 시간은 참된 존재가 아니므로 영혼 속에만 존재하며 영원에 돌아갈 것을 최종목표로 한다.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가 아니라 과거의 현재(기억), 현재의 현재(직관), 미래의 현재(예기)로 존재한다. 그래서 그는 '영혼은 기대하고(expecto) 지각하며(adtendo) 기억한다(memini)'라고 설파했다.
이렇듯 고대와 중세는 시간을 영혼과 관련 지었다.
시간이 무엇이든 우리의 삶은 시간과 관련되어있다. 시간은 사라져가는 것이지만 끊임없이 사라져가기에 시간으로써 현존한다. 제대로 된 시간계획을 세우기 위해 우리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시간에 대한 물음을 가져야 한다. 그래서 지금 바로 하이데거처럼 '시간이 누구인가'라고 물어보자. 어쩌면 이러한 질문으로 시간이 바로 나 자신이라는 사실을 자각할 때 시간을 알차게 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삶은 곧 규명해나가는 과정이다."라는 카뮤의 말처럼 시간계획에 앞서 시간에 대한 자문(自問)통해 자신만의 시간정의로 멋진 2015년을 설계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