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우성의 인천에서 시작한 최초의 역사-24.보육원
답동성당 내 '해성 보육원' 정식 설립
▲ 초창기 해성보육원 원생들과 수녀들
어느 시대, 어느 사회나 여러 가지 특수한 사정으로 인해 정상적으로 양육될 수 없는 처지에 놓이는 어린이들이 있게 마련이다.

그들을 국가나 사회가 일정 기간 부모를 대신해 보호하고 양육하는 복지시설을 '보육원'이라 한다.

6·25 직후에는 흔히 '고아원'이라 부르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 국친사상(國親思想)에서 기원을 찾는다.

즉, 나랏님이 친히 고아의 어버이가 되어 그들을 보호하도록 했다.

고려 때는 단위지역 책임제로써, 조선시대에는 진휼청(賑恤廳) 부설로 '유접소(留接所)', '진장(賑場)'을두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 전재)

근대적 의미의 보육원은 인천에서 처음 문을 열었다.

1894년 8월 프랑스 '센뽈수녀회' 소속인 마리클레스, 엠마누엘, 사베리오 등 세 명의 수녀들이 집 없이 방황하는 어린이들을 데려다 보살피기 시작했다.

원아가 점차 늘자 이듬해 답동성당 안에 정식으로 보육원을 설립했다.

초창기 수녀들의 헌신을 16대 원장 방 마리아 수녀는 이렇게 전한다.

"외부의 도움 없이 수녀들이 직접 일했고, 식량도 부족해 보리밥에 소금국이 전부였답니다. 여러 수녀들이 폐병에 걸리거나 굶어죽기까지 했다고 합니다."(역사자료관 엮음, '인천역사문화총서' 26권 전재)

그 같은 실정은 1920년에 가서도 별로 나아진 것 같지가 않다.

기록에 따르면, 그해 박창한, 정치국, 장석우, 주명기 등 지역 유지들이 거금 2천44원을 갹출해 답동성당에 전달했다고 한다.

해성보육원은 1924년 10월 법인으로 등록했고, 1932년에야 2층집으로 개축할 수 있었다.

특기할 것은 1935년 10월 보육원 운영을 위해서 부속 '해성병원'을 개설했다는 점이다.

보육원 운영에 큰 사명감을 가지고 있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 예라 하겠는데, 1937년에 이르러서야 사정이 펴져 당시 인천서는 볼 수 없는 현대식 3층 건물을 신축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1948년 12월 남구 용현동으로 이전한 후, 원사를 확장하는 한편 유아원과 영아원을 분리하여 운영했다는 사실이다.

일찍이 사회적 보육에 먼저 눈을 뜬 인천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번과 같은 '어린이집 사건'이 벌어져 민망하기 그지없다.

/조우성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