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흥수 인천동구청장
옛날 인천 지도를 들여다보면 인천부 다소면의 해안가에 제물(濟物)이라는 지명이 보인다. 지금의 중·동구 지역이다. 중·동구 쪽에 사람이 많이 모여 살게 된 것은 1883년 인천 개항 후 얼마 안 가서이다.
중구에는 조계지·신시가지가 만들어지고 일본인·중국인·외국인들이 많이 거주한 반면, 동구에는 거기에서 밀려난 조선인들이 많이 거주했다고 한다. 그 이후 동구는 일제강점기, 해방과 6·25, 산업화기에 이르기까지 과밀한 주거 지역으로서 전통을 이어왔다.

동구에는 유별나게 호적 인구가 많다. 현재 동구의 인구 규모는 7만4000명 정도에 불과하다. 그러나 호적 인구는 41만6000명이 등재돼 있다. 전국에서 다섯 번째로 많은 호적 인구라고 한다. 인천 인구가 100만 명을 상회한 것은 1979년이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동구에 그만큼 많은 인구가 살았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50대를 넘어선 사람들 중에 누군가 "인천이 고향입니다"라고 말하면 십 중 육칠은 동구 출신일 것이다. 도시가 오래된 만큼, 동구에는 역사문화적 지층이 두텁게 형성돼 있다. 인천 사람의 삶과 터전에 관한 스토리 또한 끊임없이 만들어져 왔다.

대외관계에서 중요한 사적으로는, 개항 전 1882년 슈펠트 제독이 스와타라호를 타고 먼 바다를 건너와 조선의 신헌 대관과 함께 화도진에서 역사적인 조미수호통상조약에 서명했다.
6 ·25전쟁의 반전을 이룬 인천상륙작전이 감행된 3개 지점 중 하나가 만석동(Red Beach)에 있다. 근대 문물의 세례를 받은 곳으로서 인천 최초의 상수도 공급 시설인 송현배수지(1908), 인천 최초의 보통학교인 창영초교(1907, 인천 3·1운동의 진원지), 인천 최초의 사립학교 영화초교(1892), 여선교사 기숙사(1894) 등이 남아 있다.

인물은 어떠한가. 부통령과 국무총리를 지낸 대정치가 장면, 진보 정치의 거두 조봉암 선생(아직까지 인천에서 유일한 대통령 후보이다), 토지의 작가 박경리, 여성운동가 김활란, 배우 황정순·최불암·박상원, 교육부장관 황우여, 육군 소령 강재구, 인천시장 안상수·유정복, 메이저리거 류현진 등이 동구에서 성장했거나 거쳐갔다.
한편 인천 사람들이 오랫동안 각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장소가 있다. 수도국산과 배다리, 괭이부리마을 등이 바로 그곳이다. 수도국산이 있었던 자리에는 '달동네박물관'이라는 것을 만들어서 1960~1970년대 생활상을 정교하게 복원해 놓았다.
배다리 하면 헌책방이 먼저 떠오르는데, 여기야말로 스토리가 많았던 곳이다. 조봉암 선생의 대통령 후보 사무실이 있었으며, 박경리 작가가 신혼 무렵을 지냈던 곳이다. 우각로를 따라 고색창연한 모습의 근대건축물 3동이 자리잡고 있다.
옛 지명 우각리에서는 경인철도 기공식이 있었다. 그외에도 꿀꿀이죽, 막걸리공장, 성냥공장 등이 기억된다. 먼 시절의 군대에서 '인천의 성냥공장 아가씨'라는 노래는 인기 최고의 군가였다. 만석동에 있는 괭이부리마을은 김중미 작가가 '괭이부리말 아이들'이란 책을 써서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
이 괭이부리마을이 도시재생사업의 우수 모델로 각광받고 있다. 본래 일제 때 노동자 합숙소가 있었는데, 6·25 이후 판자집·쪽방이 밀집하면서 빈민촌으로 됐다. 한때 전면 개발하여 밀어버리려는 논의가 없지 않았다.
몇 년 사이에 '원주민 재정착'이라는 컨셉을 가지고 일부 지역은 임대아파트를 건립하고, 일부 지역은 보존하는 방식으로 마을을 만들어왔다. 집 수리를 하고, 공동 화장실을 바꾸고, 경로당과 작은 녹지가 생겨났다. 부근 대기업은 김치공장을 지어줬다. 이러한 노력들이 높은 평가를 받아서 지난 12월, 대통령과 시·도지사 앞에서 사례발표를 한 바 있었다.
도시마다 라이프 사이클(life-cycle, 탄생-번영-쇠퇴-회복 또는 정체)의 국면이 있다. 동구라는 도시 창고에는 오래된 것들, 특이한 것들, 말 많은 것들이 빼곡하다. 동구만의 가치를 창조할 수 있는 호재이다. 도시 활력의 회복, 이런 데서부터 할 일을 찾아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