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정체성 찾기] 강옥엽의 '인천 역사 원류'를 찾아서
19> 정신과 사상의 생성지 인천 ① - 팔만대장경
▲ 강도(江都)시대
▲ 선원사 터
인천의 역사적 성격을 유형화해 보면,'왕도의 공간'과 더불어 '정신과 사상의 생성지'라는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단군의 유향이 서린 참성단에서부터 전등사, 보문사 등 전통사찰과 학산서원이나 인천향교 등 유교정신의 실천공간이었던 것이 그렇다. 특히, 고려후기 제2수도였던 강화도에서의 팔만대장경 조판, 조선시대 강화학파의 근거지, 근대 개항 후 개신교 등 사상의 수용지였던 사실이 이를 설명하고 있다.

▲대장경 판각의 배경
대장경(大藏經)은 불교의 경장(經藏·율장(律藏)·논장(論藏)의 삼장(三藏)을 집대성한 것인데, 석가모니의 말씀과 교단이 지켜야 할 계율, 교리에 관해 뒤에 제자들이 연구한 주석 논문을 모은 것을 말한다. 즉, 대장경은 불교 연구에 관한 자료 문헌을 총망라한 불교총서이다.

고려시대에 대장경이 처음 조판된 것은 현종 2년(1011) 거란족의 침입으로 전란을 겪은 때였다. 이것을 초조대장경(初彫大藏經)이라 한다. 이후 문종 1년(1047)에 2차 조판을 통해 빠진 것을 다시 보완한다. 그러다 숙종 1년(1096)에 대각국사 의천(義天)이 모은 송·요·일본 등의 것과 국내의 것을 결집하는 제3차 조판이 이뤄지는데 이를 속장경(續藏經)이라 한다. 그러나 고종 19년(1232) 몽골군의 제2차 침략 때 부인사(符仁寺)에 봉안한 대장경판(제1차~제3차 조판본)이 전소(全燒)돼, 대장경의 재조(再彫)에 착수한다. 이것이 팔만대장경으로 제4차 조판이다.

'팔만대장경판'은 고려 고종 23년(1236) 대장도감을 설치하고 무려 16년에 걸쳐 8만여 판의 경판 간행에 착수해 고종 38년(1251)에 완성된다. 이 기간이 바로 대몽항쟁을 하기 위해 수도를 개경에서 강화도로 옮겼던 '강도(江都)시대'에 해당한다.

국운이 위태로웠을 당시, 16년이란 오랜 시간을 들여 8만개가 넘는 대장경판을 만든 가장 큰 이유는 부처님의 힘으로 몽골족의 침략을 물리치겠다는 정신력의 결집이었다. 실제 200여년 앞서 거란족이 침공했을 때 초조대장경판을 만들었고 거란족이 물러났던 사실이 있었다. '팔만대장경판' 제작은 이러한 염원의 발현이었다.

▲팔만대장경 조판 과정
팔만대장경의 조판은 당시 최씨무인정권의 최고 권력자인 최이(崔怡)의 주도로 강화 천도 2년 후인 고종 23년(1236)에 시작돼 그 아들인 최항(崔沆)이 집권하던 고종 38년(1251)에 이르기까지 무려 16년이라는 장기간에 걸쳐 완성됐다.

팔만대장경은 16년의 공역기간동안 참여한 각수(刻手)만 1700~1800명이고, 소요된 경판 목재만 280t으로 추정된다. 조판을 위해 강화도에는 대장도감, 남해에는 분사도감을 두고 진행을 했다.

우선, 경판의 재료가 되는 목재는 거제도에서 자생하는 후박나무를 비롯해 산벚나무·가래나무·박달나무 등을 사용했다. 벌목한 나무를 1년여에 걸쳐 바닷물에 담가 결을 삭게 한 다음, 다듬어서 밀폐된 곳에 넣고 소금물로 쩌서 즙액을 완전히 빼고 전면에 얇게 옻칠을 해서 살충작업을 한다. 그런 다음 판이 뒤틀리지 않게 연판처리(鍊板處理)를 하고, 그 후에 대패질과 양쪽 가에 마구리를 붙이는 작업으로 마무리가 된다. 목재 마련과 함께 새기는 작업(淨寫)에 들어가는데 종이와 먹이 다량 필요했다. 종이는 엷은 닥종이를 제작·사용했다. 그런 다음 대장경 본문을 일일이 논증해 오자 등을 교정·보수한 후 완료된 것부터 즉시 판각이 이뤄졌다.

▲강화도와 팔만대장경
당시 대장도감은 강화도에, 분사도감을 남해에 두고 진행했는데, '대장도감'은 팔만대장경의 판각 업무를 총괄하려는 목적으로 강도(江都) 내에 설치했던 국가기관이었다. 이 대장도감이 언제 설치됐는지, 또 강화도 내 어디에 설치됐는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다. 다만, 고려 무신정권기에 활동했던 문인 이규보의 <대장경각판군신기고문> 등 몇 가지 사료를 통해 대략 고종 23년(1236)에 설치됐고, 강화산성 서문 밖에 있었던 정도로 추측되고 있다. 이와 관련해 강화 선원사가 당시 판각을 주도한 사찰로 알려져 있는데, 대장도감이 선원사 내에 있었는가의 문제와 선원사의 위치 비정 등은 논의돼야 할 또 다른 과제로 남아 있다.

'분사도감'을 특별히 남해도에 둔 것은 몽골의 침입을 피할 수 있고, 거제도 등으로부터 대장경 판각용 목재를 조달하는 데에도 편리했기 때문으로 보고 있다. 남해도의 행정관할이 진주목이라 흔히 '진주분사대장도감'으로도 불렀는데, 진주는 바로 최충헌의 식읍(食邑)이 있던 곳으로 최씨 일가가 대대로 경제적 기반을 구축한 곳이었다.

선원사는 고종 32년(1245) 최이의 원찰로 창건돼 팔만대장경 판각을 주도한 사찰로 전하고 있다. 조선시대 들어와 태조 7년(1398) 5월10일 대장경판이 선원사를 떠나 한양의 지천사를 거쳐 해인사로 이운됐던 것으로 나타나는데 해인사가 선택된 것에는 경판을 보관할 수 있는 지리적, 환경적 조건이 우선적으로 고려됐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대장경이 강화도를 나와 언제 어떤 경로로 해인사에 도착했는지는 자료의 부족으로 전혀 알 수 없고 학자들의 논의만 분분하다.

팔만대장경의 우수성과 문화사적 의의는 세계기록유산(2007)으로 등재돼 있다는 사실이 설명하고 있지만, 무엇보다 국난의 시기에 문화 활동을 통해 이를 극복해 갔던 정신력에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인천은 바로 그 정신적 결집의 공간이었다.

/인천시 역사자료관 전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