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정체성 찾기] 이영태의 한시로 읽는 인천 옛모습
12> 이규상의 '일몽고(一夢稿)'에 나타난 문학산성
이규상(李奎象, 1727-1799)은 자(字)는 상지(像之), 호(號)는 일몽(一夢)·유유재(悠悠齋)이며 본관은 한산(韓山)이다. 이규상은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집안으로 그의 아버지 이사질(李思質)이 인천부사로 있었던 시기, 1765년 인천 일대를 유람하고 18편의 죽지사(竹枝詞)를 남기기도 했다. 그의 문집 <일몽고(一夢稿)>가 전한다.

文鶴山登細路賒(문학산등세로사) 문학산 오솔길을 더디게 오르니
彌鄒曾據設邦家(미추증거설방가) 일찍이 미추가 나라를 세운 곳이네
雨過頻得鴛鴦瓦(우과빈득원앙와) 빗줄기 지나가자 원왕 기와 자주 눈에 보이고
春到偏開望帝花(춘도편개망제화) 봄의 진달래는 한쪽에만 피었네
古井生雲疑覇氣(고정생운의패기) 옛 우물에 구름이 서리니 패기는 아닐는지

叢祠無主付神鴉(총사무주부신아) 주인 없는 사당은 신령스런 까마귀가 지키네

殘城又捍龍蛇刦(잔성우한용사겁) 무너진 성곽은 임진년 난리를 막아서인지
壞粉張鱗石噴牙(괴분장린석분아) 흙은 무너져 켜켜이 비늘모양이고 돌은 뾰족하게 닳아있네

문학산성에 오르면서 소회(所懷)를 읊은 한시이다. 오솔길을 오르는 길이 더디다(賒)라는 표현으로 보건대 쉬엄쉬엄 올랐던 것 같다.

비류가 나라를 세운 곳이기에 그와 관련된 흔적들이 눈에 들어왔다. 궁전(宮殿)·공해(公廨)·사관(寺觀) 등의 지붕에 사용되는 원왕 기와(鴛鴦瓦)가 파편으로 흩어져 있지만 빗물에 씻겨 모습이 더욱 선명했다. 비류의 흔적은 기와 파편으로 남아있되 그 시절에도 피었던 진달래는 여전히 봄을 알리고 있다. 기와 파편과 진달래꽃의 대비는 시각적인 것에만 머물지 않는다.

진달래꽃을 두견화(杜鵑花)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두견새가 밤 새워 피를 토하면서 울면서 그 피로 인해 꽃이 분홍색으로 물들었다는 전설과 결부돼 있다. 전국시대 촉왕(蜀王) 망제(望帝)의 죽은 넋이 변해서 새가 되었다는 두견(杜鵑)을 염두에 둘 때, 여전히 붉은 빛을 띠는 진달래꽃은 시각에만 한정된 대상이 아니었다.

이런 소회를 느끼면서 문학산성 안의 우물로 발길을 옮겼다. 인적은 끊겼지만 우물 안에 온도 차이로 생긴 물안개는 예사로울 수 없다. 비류의 나라가 오래 지속되지는 못했지만 우물 속에서 패기(覇氣)를 감추고 있는 것으로 여길 정도로 우물 속에 나타난 물안개는 낯선 것이었다. 산 밑이 아니라 산성(山城) 안에 있는 우물에서 그런 현상을 발견했기에 그런 생각이 들만도 했다.

하지만 산성의 사당을 들르면서 그러한 생각은 바뀌었다. 황폐해진 사당은 기능을 잃었고 까마귀가 그것의 주변을 돌며 을씨년스럽게 울고 있을 뿐이었다. 성곽은 무너지고 흙은 세월의 비늘을 더께처럼 뒤집어쓰고 있었다. 간혹 흙 사이로 드러난 돌조각은 어금니처럼 날카롭기도 했다.

문학산성과 임진년 난리를 견인한 것은, 임진왜란 때 그곳을 중심으로 활약했던 인천부사 김민선(金敏善, 1542년~1592년)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전투 도중에 병을 얻어 순사(殉死)했는데, 인천 주민들이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문학산성 내에 '안관당(安官堂)'이라는 사당을 세워 제사를 받들었다고 한다.

문학산성이 누대의 역사를 거쳐 조선후기의 인물 이규상에게 포착됐다. 헝클어지고 볼품없는 산성이지만 그것을 통해 이규상은 비류 시절의 산성을 재구성해냈고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로 이어져 내려오면서 특히 임진년 난리를 산성의 마지막 모습과 결부시켰다. 김민선은 갑작스럽게 등장한 게 아니라 작자가 산성의 우물 속에서 발견한 패기의 연장이었으며 앞으로 나타날 또 다른 패기의 전조였을 것이다. 문학산성에서 패기를 떨칠 인천인물을 고대하던 이규상의 모습을 연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인천개항장연구소 대표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