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정체성 찾기] 이영태의 한시로 읽는 인천 옛모습
11> 문학산 정상에서 느끼는 낯선 경험
▲ <탄옹집>, 문학봉에 오르다(登文鶴峯).
문학산(文鶴山, 232.8m)은 산세가 학이 날개를 펴고 앉은 모습[鶴山]이며 근처에 글[文]과 관련된 향교와 서원이 있기 때문에 명명된 산이라 한다. 문학산에는 문학산성(文鶴山城), 학림사(鶴林寺), 연경사(衍慶寺), 문학사(文鶴寺) 등의 사찰이 있었다.

권시( , 1604~1672)는 조선 중기의 학자로 예론(禮論)에 밝았으며 <탄옹집(炭翁集)>이라는 문집을 남겼다. 그의 문집에 '문학봉에 오르다(登文鶴峯)'라는 한시(漢詩)가 있다.

自身未覺立雲邊(자신미각립운변)
나도 모르는 사이에 구름가에 서니
千慮萬愁變豁然(천려만수변활연)
온갖 시름 사라져 시원스럽네
意氣精神遊象外(의기정신유상외)
뜻과 정신은 세속의 밖에서 놀고
靑山碧海落吾前(청산벽해락오전)
푸른 산과 파란 바다는 내 앞에 떨어지네
環抽錦排平陸(환추금장배평륙)
비단 봉우리 휘감아 뽑아 평지에 늘어놓고
直倒銀河瀉半天(직도은하사반천)
바로 은하를 거꾸로 하여 공중에 쏟았네
若往若來何杳杳(약왕약래하묘묘)
오고 가는 것들이 어찌 이리 아득한지
武陵煙雨泛漁舡(무릉연우범어강)
무릉도원의 안개비 사이로 고깃배 떠 있네

작자는 문학산 정상에 섰다. 구름가(雲邊)와 안개비(煙雨)라는 표현으로 보건대 산에 오른 시기는 일출(日出, 曉晴) 직전이다. 산에 오르면서 숨을 바쁘게 쉬기도 하고 땀을 흘리기도 했지만 정상에서 주변을 조망하니 단어 그대로 활연(豁然, 눈앞을 가로막은 것이 없이 시원스러운 상태)이다.

산 아래는 세속이고 산 정상은 그것을 초탈한 공간이기에 정상에 있는 작자에게 자신의 정신은 세속 밖에 있는 셈이다. 문학산 봉우리의 아름다움에 대해 비단을 둥글게 휘감아서 세웠다고 표현한 것이나 폭포가 쏟아지는 모습을 은하(銀河)에 기댄 것도 작자가 세속 밖에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시선을 멀리 서해 바다 쪽으로 돌렸지만 구름과 안개비 때문에 대상들이 아득하기만 하다. 하지만 문학산 기슭의 해안가에 떠 있는 고깃배가 어렴풋하게 안개비 사이로 포착됐다.

地闊朝姿朗(지활조자랑)
땅 광활하고 아침 밝아오자
天空雨色收(천공우색수)
하늘 뻥 뚫려 비올 기운 거두었네
(영두빙불전)
고갯마루는 불전에 기댄 모습이고
潮外見漁舟(조외견어주)
조수 밖 고깃배 눈에 들어오네
俗念隨雲滅(속념수운멸)
속념이 구름 따라 사라지자
遐情與海流(하정여해류)
유장한 정도 바다와 함께 흘러가네
悠然淸意味(유연청의미)
유연히 청순한 의미로
永願滄洲遊(영원창주유)
오래도록 창주에 머물었으면

산 정상에서 주변을 조망하니 광활한 땅이 한눈에 들어왔다. 마침 아침 해가 비올 기운을 밀어내자 사찰(문학사, 文鶴寺)의 대웅전이 고갯마루와 나란히 겹쳐 보였다. 비로소 고깃배들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게 됐다.

대상의 윤곽이 점차 드러나는 것을 통해 아침이 밝아오는 과정을 읊고 있다. 산 정상에서 아래로는 광활한 땅이요, 위로는 뻥 뚫린 하늘이다. 가깝게는 사찰(寺刹)이 보이고 멀게는 고깃배가 가물거린다.

해가 뜨고 지는 자연현상은 반복성·일상성을 기저로 작동하지만, 막상 산 정상에서 새벽이 밝아오는 현상을 목격한 작자에게 그것은 남다른 감회를 느끼게 한다.

속념과 정(情)을 흘려버리고 '창주(滄洲)'에 머물렀으면 하는 바람을 진술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여기서 '창주'는 '좋은 경치를 조망할 수 있는 은자(隱者)의 거처'로 문학산을 가리킨다.

속념(俗念)에 머물다가도, 산 정상에 올라서 주변을 조망하면 잠시라도 그것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는 과거이건 현재이건 마찬가지이다. 산 위에서 원경(遠景)과 근경(近景)으로 포착된 것들은 속념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낯선 경험들이다. 권시의 한시, '문학봉에 오르다(登文鶴峯)'에서도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인천개항장연구소 대표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