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정체성 찾기] 강덕우의 인천역사 원류를 찾아서
10> 개항 후 인천의 변화②
▲ 가등정미소_인천지점.
▲ 인천 부역 제2차 확장.
한일합병을 전후해 행정구역의 정비 작업을 마친 일제는 식민지 침략의 다음 단계로서 인천부의 전설과 유래가 담긴 동명을 말살시키고, 그들의 문화를 부식시키기 위해 정(町), 정목(丁目) 등의 일본식 지명으로 변경했다. 인천부내의 일본식 지명은 대개 그들이 떠나온 일본 지명을 그대로 붙이기도 했으나 화방정(花房町)과 같이 주한 일본 초대공사로서 한국 침략을 선도한 화방의질(花房義質) 같은 이의 인명을 붙인 경우도 있었고, 전시병참체제로 접어들 즈음에는 노골적으로 일본 군함의 이름까지 사용하고 있었다.

▲부역(府域) 축소 후의 인천
1914년 일본인 중심의 행정구역 개편은 일본의 식민지경영이 강화되고 대륙침략정책이 본격화되면서 더욱 확대됐다. 1910년~20년대 인천의 공업은 정미업으로 대표됐으나 점차 수도권에 생필품을 공급하는 기능이 강화됨에 따라 인천부와 인접한 외곽 지역은 새로운 공업지대로 발돋움하면서 크게 주목받게 됐다. 나아가 소수의 이방인이 대다수의 토지를 점유하는 속에서 조선인 노동자들이 대거 인천으로 운집하는 계기가 됐다.

해를 거듭할수록 인천에 거주, 이주하는 일본인의 수가 증가했던 반면 이들 중에는 지가(地價)가 높은 도심지를 피해 부외(府外)지역에 정착하는 자가 많았으므로 이들을 부내(府內)거주 일본인과 동등하게 취급할 필요가 생겨났다. 그리고 인천 근교에 유입하는 한국인의 수도 격증했기 때문에 이들을 통한 세원의 증가도 고려의 대상이 됐다. 무엇보다 부내 인구의 증가로 인해 점증하는 병원과 학교 등의 수요를 충당하기 위한 방책이 요구되면서 결국 인천부는 넓은 부지를 요하는 공공시설의 건설을 위해 인천 부역의 확장을 검토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1934년 말 인천부는 가구 1만6539호, 인구 7만5558명에 달하는, 비좁은 도시로 변해 있었던 것이다. 현재 영종·운서·용유 지역을 제외한 중구의 인구가 6만여명인 것을 감안하면 실감할 수 있다.

▲제1차 부역의 확장
1936년 9월 공업용지와 주택지의 확보를 위해 1차 부역(府域) 확장을 단행했다. 부천군 문학면 내 학익리·옥련리·관교리의 일부와 다주면(多朱面;다소면과 주안면) 내 도화리·용정리(용현동)·사충리(주안동)·장의리(숭의동)·간석리의 일부가 원래대로 다시 인천부에 편입된 것이다. 이어 1937년 4월 '인천시가지계획'이 발표됐다. 이 계획은 1965년도를 목표년도로 설정해 인구 20만명을 계획인구로 상정해서 가로·공업용지·주택지에 관한 시가지 정비를 시도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인천은 개항장 개설 이래 어느 정도 구획정리가 돼 있어 기존의 가로를 그대로 두는 것을 원칙으로 하여 1937년 5월에 최종안이 확정됐다. 그러나 대부분의 도시가 그러했듯이 곧 전시경제체제로의 돌입으로 인한 재정난과 자재난으로 원활하게 진척되지 못했다.

인천시가지계획은 상업·공업·주거를 각 지역으로 나누고 도로 및 교통기관을 적당히 배치하며, 주거의 분산을 도모해 인구밀도의 적정을 기하고 시민의 위생·보안을 꾀한다는 목표를 내세우고 있었다. 또한 앞으로 시가의 건설에 필요한 지형들을 미리 선정해 도심지와의 거리를 고려해 두고 있었다. 우선 이상적인 거리를 도심지로 진입하는데 1시간 이내로 설정했는데, 이 역시 일본 경제인이 중심이 된 도시계획사업으로 결과적으로는 시가지계획을 일본인 위주로 추진한 후 '또 다시' 한국인을 '도시'에서 추방해 버리려는 의도가 짙게 깔려 있었던 것이다.

▲제2차 부역의 확장
1937년 7월 중일전쟁을 계기로 조선을 일본의 침략전쟁 목적에 맞도록 교통의 요지인 경인지구를 중공업과 군수공업지대로 지정하는 한편,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이른바 '경인시가지계획'을 1940년 1월 공포했다. 이 계획의 주된 내용은 이미 시행되고 있던 경성시가지계획 구역의 서남 끝에서 인천시가지계획 구역의 동북 끝까지 7개의 공단과 11개의 거주지를 건설하고, 식량공업기지로서 김포평야와 부평평야를 절대농지로 묶는다는 것이었다.

이 계획에 따라 조선식산은행 계열의 일본고주파중공업의 인천공장이 부평에 입지하고, 또한 바로 이웃하여 일본 육군의 대전차공장인 인천조병창이 입지하게 됐다. 나아가 두 대규모 공장과 직접·간접으로 연관된 산업들의 입지신청이 경인지역에 쇄도해 대량의 공업용지 확보가 불가피하게 됐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이처럼 대규모 공장의 설립 결과가, 필연적으로 초래될 인구의 집중에 대비해 주택용지를 어떻게 하면 합리적으로 국토계획선에 따라 배분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대두됐다.

그러나 이처럼 방대한 경인시가지 계획은 그 계획 자체가 너무나 광역이었기 때문에 원래의 계획에서 크게 후퇴해 실행됐다. 공업용지와 주택용지 이외에 아무런 지정이 없는 지역을 절대농지와 절대녹지로 지정해 시가지의 불합리한 연쇄팽창을 막고자 한 것에도 한계가 있었다. 결국 1940년 4월 부천군의 서곶·문학·남동·부내면 등 4개면은 다시 인천부에 편입돼, 인천부는 옛 인천부역의 대부분과 옛 부평지역을 포함하게 됐다.

이로서 인천부는 옛 인천도호부의 부역에다가 부평군까지 차지하는 넓은 부역을 갖게 됐다. 개항 직후 제물포 중심의 작은 항구도시·상업도시였던 인천사회가 거대한 항만도시이자 산업·물류도시로, 또 커다란 중공업단지와 농업단지를 배후에 두는 병참·산업도시로 그 모습을 바꾸게 됐고, 이에 따라 부평과 인천의 기능적 통합이 이뤄지기 시작해 인천 공간구조의 기본 틀을 형성했던 것이다.

/인천시 역사자료관 전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