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우성의 인천에서 시작한 최초의 역사 - 10 한용단
▲ 전국에 이름을 날렸던 '한용단' 야구 선수들.
가을 야구 시즌이 돌아왔다. 올 프로야구 왕 중 왕전의 패자는 누구일까? 팬들의 관심이 고조되고 있는 가운데 심심치 않게 야구의 경제효과도 화제로 떠오른다.

국민체육진흥공단에 따르면, 프로야구의 총생산 파급효과가 1조원에 다가간다니 놀라운 일이다. 야구가 촉망받는 스포츠 산업의 하나로 부상한 것이다.

한 세기여 전, 우리나라 지역 사상 최초로 인천에서 민간 야구단인 '한용단(漢勇團)'을 창단했을 때는 상상도 못했을 변화된 모습이다. 3·1 독립만세를 불렀던 그 해 11월13일, 뜨거운 민족혼과 항일정신을 가슴에 지닌 순수 한국인 젊은이들이 결성한 종합체육단체가 '한용단'이었고, 활동의 중심이 '야구'였다.

이 무렵, 인천에는 10여개의 청년체육단체가 있었다. 한용단이 가장 규모가 컸는데, 대학 공부를 가르칠 인문계 학교가 없어 상당수 청년들이 서울로 기차통학을 하면서 의기투합해 탄생시켰다. 스포츠를 통해 민족의식을 다졌던 단원들의 유일한 목표는 봄가을에 열렸던 야구시합에서 일인을 꺾는 것이었다고 한다.

이들을 적극 후원한 이는 손기정 선수의 가슴에서 일장기를 지워 보도함으로써 만천하에 민족정기를 떨친 인천영화학교 출신 이길용 선생이었고, 배재학당을 다니던 인천의 최영업, 박안득 선수 등과 함룡화, 장의식, 김정식 선수 등 서울에 사는 선수까지 스카우트해서 일인 팀과 대결을 벌였던 곽상훈 단장이었다.

한용단은 1922년 5월21일 '전인천야구대회' 결승전에서 심판의 편파 판정을 시민들과 같이 항의하다가 일제에 의해 출전금지를 당했다. 그 후 더 이상의 활약을 볼 수 없었지만, 인천상우회, 고려야구단 등이 전통을 이어나갔다. 이를 연구한 조준호 교수(대림대·체육사)는 "한용단은 진정한 체육인의 표상이었다"고 했다.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