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정체성 찾기] 강옥엽의 인천역사 원류를 찾아서
9> 민족정기의 상징적 공간 참성단
▲ 참성단.
▲ 참성단 제천의식.
단군은 우리 민족과 역사를 인식하는 출발점이고, 참성단은 우리 민족의 역사적 정체성을 함축한 곳이다. 매년 개천절에는 남한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마니산 참성단에서 제천의식을 갖는다. 그런 의미에서 인천은 우리민족의 정기가 흐르는 근원적 공간이라 할 것이다.

▲개천절과 제천의식
개천절은 우리 민족 최초 국가인 고조선의 건국을 기념하기 위해 제정된 국경일이다. '개천(開天)'의 본래의 뜻은 단군조선의 건국일을 뜻한다기보다는 환웅(桓雄)이 천신(天神)인 환인(桓因)의 뜻을 받아 태백산 신단수(神壇樹) 아래에 내려와 홍익인간(弘益人間)·이화세계(理化世界)의 대업을 시작한 BC. 2457년(上元 甲子年) 음력 10월3일을 뜻한다고 본다.

개천절이라고 이름 붙이기 이전부터 한민족은 10월을 상달(上月)이라 부르며 제천행사를 치렀는데, 개천의 핵심은 제천의식이다. 이러한 제천의식은 고조선 멸망 후, 고구려의 동맹(東盟), 부여의 영고(迎鼓), 동예의 무천(舞天), 마한과 변한의 계음(契飮) 등의 행사로 계승됐고, 고려와 조선에서도 단군신앙을 이어나갔다.

개천절이라 이름짓고 시작한 것은 대종교(大倧敎)에서 비롯됐는데, 일제강점기를 통해 개천절 행사는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데 기여했고, 특히 상해임시정부는 개천절을 국경일로 정해 경하식을 행했다. 광복 후에는 이를 계승하여 1949년 10월1일에 공포된 '국경일에 관한 법률'에 의거, 음력 10월3일을 양력 10월3일로 바꿔 거행하게 됐다.

▲하늘과 땅의 교차점, 강화 참성단
강화에는 단군이 하늘에 제사하던 곳으로 전하는 참성단과 단군이 세 아들을 시켜 쌓게 했다는 삼랑성이 있다. 단군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이 실려있는 <삼국유사>에 의하면, 단군의 주요 활동 무대는 평안도와 황해도 지역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즉 단군이 고조선을 건국한 곳은 평양이며 인간으로의 생을 마감한 곳은 황해도 구월산(九月山)이다. 그렇기 때문에 단군 관련 유적은 주로 북한 지역에 분포돼 있다. <고려사> 지리지 이래 각종 사서나 지리서에 언급된 남한 지역 단군 유적은 참성단과 삼랑성뿐이다.

참성단은 <고려사> 지리지에 처음 등장하면서 각종 지리지와 사서에서 단군 관련유적으로 소개되고 있다.
그러나 참성대(塹城臺)·참성초단(塹城醮壇)·마리산초단(摩利山醮壇)·마니산성단(摩尼山城壇)·마리산제성단(祭城壇) 등 여러 가지 명칭으로 불려져 왔다. 그러나 가장 보편적인 명칭은 참성단(塹城壇)이다. '참호를 파서 쌓은 성에 있는 제단'이라 풀이할 수 있다. <고려사>와 <조선왕조실록> 지리지에는 참성(塹城)에서 제사를 지낸 기록이 많이 전해지고 있어 참성이 종교적 의례가 거행되는 장소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다.

참성단의 형태는 원형으로 쌓은 하단 위에 방형의 제단을 둔 모양인데, 위의 네모난 것은 땅을, 아래의 둥근 것은 하늘을 상징하는 것이라 한다. 이는 음양이 서로 교차하게 되면 조화를 이루어 만사가 형통한다는 의미로 해석되고 있다.

참성단의 정확한 축조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참성단의 최초 기록은 <고려사> 원종 5년(1264) 5월 풍수사 백승현이 마리산 참성에서 초제 지내기를 건의해 왕이 재초를 거행했다는 기록이다. 이를 통해 참성단이 13세기 이전 어느 때인가 축조됐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당시 풍수사들이 국조 단군의 존재를 일찍부터 인식하고 단군과 관련되는 곳을 길지로 여겼던 것으로 보인다. 참성단이 단군과 연결되기 시작한 것은 고려왕실이 강화로 천도하면서부터 풍수도참가들에 의해 시작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고려와 조선왕조는 때때로 이곳에서 도교식 제전행사인 초제(醮祭:별에 대한 제사)를 거행하기도 했다.

▲국가 안녕의 기원처-참성단 개천의식
참성단이 민족의 성지(聖地)로 주목을 받게 된 것은 구한말 단군을 숭배하는 대종교(大倧敎)가 성립한 이후였다. 이때부터 강화도는 단군시대 정치중심지의 하나로 인식되고, 참성단의 네모난 상단과 둥근 하단은 각각 땅과 하늘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됐다.

고려와 조선시대 왕의 이름으로 국가에서 제사를 거행하던 장소였던 참성단의 제사는 강도시대(江都時代) 원종(元宗)이 직접 주재한 적이 있지만, 대부분 관리가 국왕을 대신하여 제사했다. 이 때 파견되는 관리는 참성단행향사(塹城壇行香使)라 했는데, 행향사는 참성단 아래의 재궁(齋宮)에 머물면서 재숙(齋宿)을 한 다음, 제의를 거행했다. 제사는 정기적인 것과 비정기적인 것이 있었다. 정기적인 제사는 봄·가을에 거행됐는데, 제사의 목적은 기록에 전하지 않지만 국가의 안녕과 평안을 기원하는 것으로 추측된다. 비정기적인 제사는 외적의 침입이나 한발(旱魃)이 있을 때 수시로 거행됐다. 국가제사의 경비조달을 위해 제전(祭田)도 별도 지급됐다.

참성단과 관련해 하늘에 제사 지낼 때 쓰던 제기(祭器)와 제물을 준비하던 천제암(天祭庵)이라는 재궁터[齋宮址]가 남아 있다. 삼단의 석축(石築)으로 돼 있는데 전체의 넓이가 약 70평 정도이고 부근에는 금표(禁標)와 표지(標識), 우물 등이 있다. 또, 숙종 43년(1717) 5월에 강화유수 최석항(崔錫恒)이 참성단을 수축한 사실을 기록한 참성단 중수비(重修碑)가 남아 있다.

단군은 우리 민족과 역사를 인식하는 출발점이다. 현재 인천광역시 강화에는 남한에서는 유일하게 단군이 하늘에 제사하던 곳으로 전하는 참성단과 단군이 세 아들을 시켜 쌓게 했다는 삼랑성이 남아 있다. 특히, 참성단은 제천의식뿐만 아니라, 1955년 이후 전국체전의 성화를 채화하고 있고, 이번 인천아시아경기대회의 성화도 채화했다. 이러한 사실은 인천이 우리 역사의 선구적, 근원적 공간이었음을 대변해 주는 것이다.

/인천시 역사자료관 전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