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길 22 옥련동-그 곳엔 '불편한 진실'이 있다

미군 유류창 위치 논·밭 흥건히 석유로 적셔

1937년 개통 수인선 … 송도 간이역 흔적만 남아

바다끼고 조개 채취하던 곳 … 홍어음식전문점 밀집

새 수인선 '옥골' 반으로 갈라 마을 사라질 판



조개 파먹으면서 살던 외딴 동네에 시커먼 연기를 내뿜는 철마가 달리기 시작했다. 곧이어 해안가에는 무의도에서 파온 하얀 모래를 깐 인공유원지가 들어서면서 '뜨거운 태양 아래 인천은 사람사태'라는 기사가 날 만큼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6·25전쟁 후 송유관이 끊임없이 이어져 들어오고 마을사람들은 기름 물을 먹고 살아야했다.

▲ 옥골 전경
문학산 옆 노적산 산줄기가 끝나는, 옥련동 양지바른 곳에 '옥골'이란 오래된 동네가 있다. 바다 쪽에서 보면 안쪽으로 '오그라져 든' 마을이라 옥골이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그곳에 동네의 연륜을 대변해 주는 기와집 서너 채가 있다. 100년이 훨씬 넘은 고택들이다.

길에서 동네 어르신 이창렬(74) 씨를 만났다. "우리가 덕수 이씨인데 고조할아버지께서 이곳에 정착했습니다. 매립되기 전까지는 마을 어귀까지 바닷물이 들어왔어요. 그물 치고 갯벌 캐고 하면서 농사를 지었기 때문에 늘 풍요로웠죠. 반농반어의 평화로운 부락이었는데 수인선이 지나가면서 많은 변화가 있었죠. 재개발이 된다고 하는데 이제 옛 모습을 볼 날도 얼마 안남았어요."

새로운 수인선은 옥골을 반으로 가르고 있다. 기찻길에 길을 내주기 위해 동네 곳곳이 파헤쳐져 어지럽다. 재개발 계획대로라면 이 마을은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옥골은 불편한 진실을 하나 품고 있다. 오랫동안 기름으로 뒤범벅돼 땅이 신음을 하고 있다. 한동안 옥골을 '기름골'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1950년대 초 시립사격장 인근 산기슭에 미군 유류창이 자리 잡았다. 수원비행장 등 수도권 일대 미군부대에 기름을 공급키 위해 지름 30m의 대형 유류저장탱크 수십 개가 산기슭 전체를 뒤엎었다. 탱크 하나당 용량은 1500 드럼을 담을 엄청난 크기였다. 인천항으로 유조선이 들어오면 기름은 POL(미군유류보급창, 옛 SK저유소)에서 파이프라인을 통해 이곳까지 와서 저장탱크에 시커먼 기름을 콸콸 쏟아 부었다. 송유관 파이프는 이음새가 자주 터져 논과 밭을 흥건하게 적시곤 했다. 추운 겨울에는 바다의 큰 얼음조각이 파도에 밀려와 종종 파이프를 터트렸다.

기찻길 옆 사람들은 당시 귀하디귀한 석유를 땔감으로 펑펑 땠다. 기름이 새는 이음새에 깡통을 받쳐 기름을 받았다. 미군 병사들이 정기적으로 기차를 타고 순찰을 돌곤 했다. 파이프에서 철철 흘러나온 석유를 모두 깡통으로 받아낼 순 없었다. 넘쳐난 기름은 땅으로 스며들었다. 주민들은 땅을 파서 웅덩이를 만들어 놓았다. 비가 오면 기름이 물과 함께 그곳에 고였다. 두껍게 말라버린 기름층을 회 뜨듯 양철로 벗겨서 그릇에 담았다. 이것은 훌륭한 땔감이었다. 왕겨에 버무려 때면 한줌의 겨만 갖고도 하루 종일 거뜬히 불을 땔 수 있었다. 집집마다 장독이나 드럼통(도라무깡)에 보관했다. 남는 것은 몰래 내다 팔기도 했다. 돈이 되다 보니 아예 전문적으로 기름을 훔치는 일당들이 원정을 오기도 했다. 기름탱크는 지난 1971년 미군 유류창이 포항으로 이전한 뒤에도 한동안 방치돼 있었다. 유류저장탱크가 산에 박힌 이후 옥골에서는 그 누구도 우물을 파지 않았다. 이곳에서 태어나 현재까지 살고 있는 옥골 원주민 이종림 (64) 씨는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저기 산 중간 중간 평평한 곳이 당시 기름 탱크들이 놓였던 곳입니다. 기름 붓는 말이면 온종일 기름 냄새가 가시질 않았어요. 우물을 파면 기름이 둥둥 떴어요. 그 물을 끓이면 붉은 끼가 보였습니다. 어렸을 적 인천 전역에 콜레라가 돌아서 저기 송도역 인근까지 사람이 죽어 나갔는데 우리 마을엔 한 사람도 전염병에 걸린 사람이 없었어요. 어른들이 그럽디다. 우린 기름 물 먹어서 역병에 안 걸린다고."

▲ 옛 송도역 전경
1937년 수인선이 개통되면서 옥련 지역에 역이 하나 만들어졌다. 역명은 동네이름을 따서 '송도역'으로 붙였다. 수인선 협궤열차는 1979년 남인천역-송도역 간, 1992년에는 송도역-소래역 간 운행이 중지되었다. 철로가 폐쇄되면서 송도역도 문을 닫았다.

송도역은 그 기능을 다했지만 시골 간이역의 모습을 지니고 있는 역사(驛舍)의 흔적은 가까스로 남아있다. 역사는 너무 낡아서 비가 오면 물이 새 얼마 전에 슬레트 지붕에 천막을 씌웠다. 누군가 설명해주지 않으면 한갓 낡은 건물로 밖에 볼 수 없는 이 역사는 자신이 옛날에 철도역이었음을 스스로 설명하고 있다. 역무원 사무실로 사용했던 방 외벽에 아직도 '송도'라는 명찰을 달고 있다. 수없이 칠해진 페인트칠에도 감춰지지 않는 '사실'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나마 낡은 물건 하나가 철도 정거장이었음을 명확히 말해준다. 송도역에서 학익동 쪽으로 30미터 가량 내려가면 녹슨 철탑 위에 커다란 철통이 놓여있다. 급수탑이다. 꿱꿱- 수 백리를 달려 온 화차가 목마름에 겨워 시원하게 물 한 모금 마셨던 곳이다. 증기기관차가 수인선을 달렸을 때 사용한 물통이니 족히 50-60년은 된 물건이다. 비바람에 심하게 녹슨 급수탑이지만 주둥이에서 금방이라도 물을 쏟아낼 것 같은 모습이다.

그 옛날 송도역은 물물교환 장소의 역할을 톡톡히 했다. 역전 공터에는 번잡한 장이 섰다. 소래, 군자 쪽에서 건너온 촌로와 수인역 쪽에서 온 아낙네가 서로의 물건을 내놓고 흥정을 벌였다. 폐선이 되면서 이 모습은 사라졌다. 대신에 송도역전 시장이라는 상설시장이 들어섰다.

시장 안 송도방앗간 이연수 사장이 과거의 이곳 풍경을 그려 줬다. "3, 40년 전 송도역 건너편에 수인선 양쪽에서 온 사람들로 늘 복잡했지. 각종 농산물을 비롯해 닭, 어류 등을 내놓은 좌판이 줄지어 있었어요. 수인선이 폐선되면서 장사꾼들의 발이 묶였고 급격히 위축된 거죠. 그 자리에 상가 건물들이 들어섰고 그 뒷쪽으로 현재 이 시장이 생긴 겁니다."

송도역전시장 조차 이제 그 명맥을 잇기 쉽지 않은 듯하다. 상권이 위축되면서 40여개의 가게만 장사를 하고 있고 몇 년 전에 시장번영회도 없어졌다. 시장 안 쪽으로 가면 송도초등학교가 있다. 1948년 학익국민학교의 분실로 개교한 학교다. 당시 군자, 소래 등 수인선 변에 살던 학생들이 수인선 꼬마열치를 타고 이 학교를 다녔다.

철로는 없어졌지만 기찻길의 흔적은 아직 남아있다. 옥골 동네 앞에는 기다란 둔덕이 엎어져 있다. 이것이 철로가 놓였던 기찻길이다. 협궤열차가 다니던 외길답게 다리를 양쪽으로 뻗으면 닿을 만한 폭이다. 이 길을 따라 걸어 내려가면 조개고개에 다다른다. 사람들이 홍어회골목이라고도 부르는 곳이다. '조개고개'라는 이름은 그 아래편에 조개조합이 있었기 때문이고 '홍어회골목'은 홍탁, 홍어회 무침 등 홍어음식점들이 밀집해 있었기 때문이다.

▲ 조개 캐던 모습
동양화학이 바다를 매립하기 전까지 이 동네는 바다를 끼고 있던 동네다. 물끝 따라 나가서 반나절 만에 망태기 하나 가득 조개를 캐오던 곳이다. 갯일을 마치고 고개를 넘던 아낙들이 하나둘씩 흘리고 간 조개들로 길 위가 까맣게 보여 조개고개라는 이름을 얻었다는 이야기가 있을 만큼 조개가 흔했던 곳이다.

예전만 못하지만 아직 이 골목에 들어서면 홍어 삭힌 냄새를 맡을 수 있다. 도로 양편으로 충남홍어, 흑산도홍어, 할머니홍어 등 빛바랜 간판을 달고 있는 몇몇의 홍어집이 그 명맥을 잇고 있다. 이곳에 처음 홍어집이 들어선 것은 대략 40년 전쯤. 인천에 일자리를 얻은 아들을 따라 충남 대천에서 올라온 충남홍어의 김찬례 할머니가 식당을 내면서부터다. 당시 노적산 기슭에 예비군 훈련장이 있었다. 훈련을 마친 예비군을 상대로 밥장사를 하던 할머니가 간단하게 홍어무침을 반찬으로 내놓았다. 여기에 매콤한 맛을 진정시켜주는 조갯국을 함께 내놓았다. 바로 인기폭발. 뜻밖에 좋은 반응을 얻자 아예 홍어집으로 업종을 바꿔버렸다. 이후 입에서 입으로 홍어맛 소문이 번져나가면서 주변에 하나둘씩 홍어회집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흑산도 홍어집 사장 정이석(64) 씨는 인하대 자리에 있던 피란민 수용소에서 태어났고 이후 이곳에서 일생을 보낸 이곳의 산 증인이다. "한때 줄서서 먹었어요. 자리가 없으면 그냥 마당에 자리 깔고 먹기도 했죠. 순전히 조갯국을 먹기 위해 홍어회를 먹는 사람도 많았어요. 그냥 앞마당 나가듯 나가서 조개를 잡아오면 됐으니까… "

/월간 굿모닝인천 편집장


그때, 이 곳

▲ 인천결핵요양원
▲ 인천결핵요양원
현재 적십자병원 자리에 있던 인천결핵요양원은 '인천개항 100년사'에 의하면 1940년 11월20일 '연수장(延壽莊)'이란 이름으로 개원했다. 남한에서는 최초로 세워진 결핵전문병원이었다. 6.25 전쟁 중 인천결핵요양원은 송도에 주둔하고 있던 영국군의 휴양소로 잠시 사용되었지만 53년 휴전 후 전쟁고아 결핵환자 22명을 수용하면서 그 기능이 다시 정상화 되었다. 인천시는 환자들이 계속 늘어나자 송도역에서 요양원까지 가는 도로를 뚫었고 요양원은 병실을 증개축 했으며 앞뜰을 3000 평으로 넓히고 잔디와 옥향나무 등을 심어 대저택의 정원처럼 꾸며 놓았다. 이 때문에 영화 촬영의 단골 장소가 되었다. 당시 인기 절정이었던 가수 김정호가 1980년에 입원하기도 했는데 '고독한 여인의 미소는 슬퍼'라는 노래를 이 때 만든 것으로 전해진다. 인천결핵요양원은 1996년 6월 5일 문을 닫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 새인천풀장
조개고개 건너편에 새인천풀장이 있었다. 동양화학에서 70년대 말에서 80년대 초까지 잠시 운영했던 노천 풀장이다. 키 작은 아카시아나무 몇 그루 밖에 없던 뙤약볕 아래의 풀장이었지만 아쉬운 대로 시민에게 인기 있었던 여름 놀이터였다. 이곳의 행락객들도 조개고개에 와서 허기를 달래곤 했다. 송암미술관 입구 쪽에 있던 바닷물을 끌어들여 이용한 도크식 풀장이었다. 7·80년대 당시 청학풀장, 율목풀장과 함께 각광받던 곳이다.
이 풀장은 동양화학과 관련 있는 동양관광개발에서 운영했는데 1976년 이회림회장은 동양화학 소유 해면 1만5000평 매립지에 8억원을 투입해 수중터널을 비롯하여 해수풀장, 수족관, 조탕(潮湯), 관광호텔, 쇼핑센터 등 동양 최대 규모의 관광지를 계획했지만 무산되었다.

▲ 외국인묘지
▲ 외국인묘지
청학동외국인묘지에는 1883년 인천항 개항 이후 국내에 체류하던 랜디스 박사, 오례당 등 의사, 외교관, 선교사, 선원 등 여러 분야에서 활동을 하다가 이 땅에서 숨진 외국인 66명이 안장돼 있다. 묘역은 중구 북성동 1가 1번지에 자리하고 있었으나 시가지가 팽창함으로써 1965년 3월25일 이곳 청학동 53번지로 이장했다. 한편 인천에 살던 중국인들의 묘는 부평가족공원에 따로 묘역이 조성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