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현 고유섭 그의 삶과 학문세계 17
『조선미술사』 (하)"종소리는 때리는 자의 힘에 응분해 울려지나니"
   
▲ 김홍도필 군선도 병풍(金弘道筆 群仙圖 屛風). 초자연적인 인물상을 그린 도석인물화. 본래는 8폭의 연결된 병풍그림이었으나 지금은 8폭이 3개의 족자로 분리되어 있다.


필생기획 조선미술통사 저술

죽음 예감하면서도 학문전력

방대·치밀한 略史 목차 남겨

후학들에 연구방향 기틀마련


東西 융합 … 풍요로운 방법론

日 주도 학계에 균형추 역할

홀로 개방·자득의 학풍 정립



▲ '거대한 설계도' 조선미술약사 초고
우현은 '조선미술약사(朝鮮美術略史) 초고(草稿) 총목(總目)'을 작성해 두었다. 이 목차는 우현이 생전에 조선미술 통사(通史) 저술을 위해 작성해 두었던 것으로, 저자가가 구성했던 '조선미술사'의 체제와 내용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총론'은 다섯 갈래로 나누었다. 제1장은 지리적 특질, 제2장은 인문적 특질이다. 이 제1-2장에서 지리와 인문 두 가지 '특질'을 설정함으로써 미술사의 근거를 '자연의 이치와 풍토로 구성되는 지리' 그리고 '인간의 문명과 역사로 누적되는 인문'에서 획득하고자 했던 것 같다. 제3장은 문화적 사적 의의이다. 이는 미술사를 문화사로 파악하는 관점을 제시하고자 했다고 볼 수 있다. 제4장은 예술적 분류인데, 건축·조각·회화·공예로 나누고 있다. 다만, 회화 부분에서 서(書)·사군자(四君子)를 부(附)로 붙인 것이 이채롭다. 제5장 시대의 분류를 따로 두고 있다. 이것은 미술사에서 시대구분론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강조해 둔 것이라 하겠다.

이어 각론에 해당하는 내용을 적고 있는데 제1편 건축미술사, 제2편 조각미술사, 제3편 회화미술사, 제4편 공예미술사를 각각 세목으로 나누고 있으며 마지막으로 '조선미술사 총결론'이란 것을 두고 있다. 이에 대해 최열은 이렇게 이야기 하고 있다.

"선생의 설계도면은 푸른색에 흐릿하게 감춰진 이 '초고 총목'에 뚜렷하게 드러나 있다. 도면의 머리말에 해당하는 '총론' 부분에서 사관(史觀)의 요체를 전개하고 이어 각론으로 건축·조각·회화·공예 순으로 펼쳐 나간 구상의 전모는, 비록 제목뿐이지만 방대하고 치밀하기 그지없는 규모로 한눈에도 드러난다. 이와 같이 원대한 구상 아래 써내려 갔다면 20세기 후반 조선미술사학의 성취는 거의 한 세기를 앞서 나갔을지도 모른다. 선생은 구상 실현을 앞두고 그 몫을 미뤄 둔 채 홀연 미술사학 동네를 떠나 버리셨다. 하지만 더 많은 잎사귀와 열매를 던져 놓으셨으니, 선생의 분야별 연구가너무도 크고 탐스럽다. 저 빼어난 성취를 선생이 마련해 놓은신 조선미술사 구성 방법에 따라 열거해 두고서 그 가치를 엿보아 미리 새겨 둠은 벅찬 즐거움일 것이다." <『우현 고유섭 전집』2, 「조선미술사 하·각론편」, 열화당, 2007.>

 

   
▲ 정선필 인왕제색도(鄭敾筆 仁王霽色圖). 비온 뒤 안개가 피어오르는 인왕산의 인상적 순간을 포착해 그 느낌을 잘 표현한 실경산수화.


▲ 전분야를 아우른 불후의 노작
삶의 거처인 건축을 대상으로 삼는 연구에서 범위를 좁혀 미술로서의 건축을 뚜렷하게 설정한 선생은, 현전(現傳)하는 건축물이 없는 조건에서 조차 그 희미한 유적 위에 다양한 문헌을 동원해 삼국시대 건축미술의 모습을 추적해냈거니와, 궁성과 성곽은 말할 것도 없고 고구려 쌍영총(雙楹塚)과 같은 문묘와 백제 미륵사(彌勒寺)와 같은 사찰로써 건축미술의 윤곽을 그려내는 성취와 더불어 여기에 현전 유물이 가장 많은 탑으로써 건축미술의 대강을 정립해냄에 이르렀던 것이다.

더욱이 지금까지 온전히 보존된 불국사(佛國寺)와 석불사(石佛寺)를 대상으로 삼은 「김대성(金大城)」이야말로 건축미술 연구사의 중후한 성취라 하겠다. 이 글은, 문무왕(文武王) 수장(水葬) 사실과 관련된 문무왕비(文武王碑)·인각사비(麟角寺碑)에 관한 논문을 남김으로써 18세기 가장 빼어난 학자로 평가받고 있는 홍양호(洪良浩)가 성취한 금석고증학(金石考證學) 수준을 연상케 하는 실증주의 태도의 엄밀성과 더불어, 근대 서양미술사학의 다양한 방법론을 거침없이 사용하는 미술사학자의 전범을 보여준다. 유적 및 문헌이 머금고 있는 전설과 사상, 자연환경과 역사사실 그리고 조형형식을 아울러 하나로 일치시켜 나가는 이른바 과학적 통찰력의 진수가 이런 것이구나 싶다.

광범위한 자료를 동원해 유물 부재 상황을 극복해낸 「고려의 불사건축(佛寺建築)」도 그러한데, 더욱 놀라운 것은 목탑·전탑·석탑의 관련 내용을 확정지은 논문 「조선 탑파(塔婆) 개설」이다. 그 기원과 내용·재료·양식분류로 이어지는 논지의 전개가 물 흐르듯 유창하니 건축미술사학의 기념비와도 같다.

이에 더하여 별도의 저술인 『조선건축미술사 초고』와 『조선탑파의 연구』가 있으니 여기서 조선 건축미술의 편년과 특성·양식을 거의 완전의 경지로 이끌어 올려놓았음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조각분야 연구가 더욱 흔치 낳던 시절 일찍이 1931년에 발표한 「금동미륵반가상(金銅彌勒半跏像)의 고찰」은 눈부신 논문이다. 동북아시아 시야에서 인도로부터 기원을 고찰하고, 나아가 그 세부 조형과 양식을 실증하는 가운데 "조선 독특의 예술미를 가진 불상으로 조선미술사상 한 준령(峻嶺)을 이루는 것"이라는 가치평가에 도달했는데, 그런 평가를 가능케 하는 근거를 일본 고류지(廣隆寺)의 목조미륵반가상에 대한 서구인의 평가로 대신하는 개방태도가 돋보인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백미는 금동미륵반가상의 제작에 대한 "실로 감수성 있는 예술가의 기질(氣質)과 유연한 공상(空想)과 일종 환몽(幻夢)에 가까운 정서"라는 선생의 표현이 아닌가 한다. 한편, 선생은 "실로 경탄할 신기(神技)"라고 했던 석굴암 조각에 대해서는 별도의 논문을 남기지 않았고, 1934년에 발표한 「조선 고적(古蹟)에 빛나는 미술」에 그 핵심만을 서술하고 있을 뿐이다. 선생이 조각분야 연구를 뒤로 미루었던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논문조차 몇 편 남기지 않았다.

어쩌면 선생이 말한 "종교·실용 조각 밖에 없고 자유예술로서의 조각은 발생하지 아니 하였다"는 생각 탓인지도 모르겠다. 다만 「조선의 조각」에서 삼국시대는 상징주의, 통일신라시대는 이상주의, 고려시대는 사실주의로 함축하고 조선시대의 경우엔 아예 '갱생하기 어려운' 이른바 불모시대로 규정한 학설은, 지금도 여전히 통설의 지위를 누리고 있는 바 그대로다.

선생이 회화분야 글쓰기에 전력을 다할 새도 없이 세상을 등졌으니 그 안타까움이야 도리 없지만, 고구려 벽화에 대한 회화의 내용과 기법 그리고 그, 사상과 교섭에 이르는 분석만으로도 이미 풍요롭다. 고려회화 또한 특색은 물론 배경에 이르는 핵심과 함께 중국·일본과의 교섭사를 다루었고, 조선시대에 이르러 서화를 천기(賤技)로 여기는 시대풍조에 대해 강희안(姜希顔)을 예로 들어 미술의 불행을 "정치의 불운은 문화의 불운"이라고 함축했다.

하지만 그 내면적 화취(畵趣)와 더불어 중국 화풍과의 관련에 이르는 특성을 제시함으로써 조선시대의 회화의 또 다른 성격을 암시했는데, 안견(安堅)의 화풍과 더불어 화파를 이루는 영향력은 물론 김홍도(金弘道)와 그의 시대 거장들 사이를 세심하게 설파하는 데로 나아갔다. 정선(鄭敾)에 대해서는 과거 사람들의 찬사가 지나친 것이라면서 정선이 화법에 주역(周易)의 이치를 적용했다고 한 설을 "동양적 신비론·관념론에서 나온 과장일 뿐"이라고 일축했지만, 한편으로는 정선에 이르러 '조선적 특수성격'으로 '동국진경(東國眞景)'이 비로소 미술계에 자리잡았음을 지적했다. 정선의 요체만이 아니라 동북아시아 회화의 보편과 특수를 함축하는 방법론을 드러내고자 한 선생의 지향이 이렇게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한다.

1940년에 발표한 「조선의 회화」가 선생의 회화사의 매듭인데, 이 글에서 조선 시대 고분벽화야말로 중앙아시아를 통한 동서문명의 혼효(混淆)이자 일본화(日本畵)의 뿌리임을 지적했다. 고려시대에 이르러 장식화·불화·화원화는 물론 사대부 문인화의 발생을 거론하는 가운데 강건함보다는 선조의 섬려함과 유약함을 특색이라 지목했고, 조선시대 회화는 송(宋)·원(元)의 수묵화체 화풍을 특색으로 삼고서 일본 수묵화에 영향을 끼쳤다고 했다.

선생은 조선의 회화를 '중국화의 한 유파'라며, 다만 고려 말부터 자연히 조선적인 기풍을 갖추었다고 대략을 짚어 두었다. 하지만 너무도 부족하다 여겼을 선생은 전력을 기울여 『조선화론집성(朝鮮畵論集成)』을 완성했다. 거기 새긴 뜻을 헤아리면 선생이 회화사 연구와 집필을 위해 얼마나 헌신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고, 또한 이를 바탕 삼았다면 지금 미술사학은 다른 수준을 누리고 있었을 것은 너무도 뚜렷하다.

공예분야에서 선생은 자신의 예술론을 적극 드러냈다. 1935년에 발표한 「신라의 공예미술」에서, 공예는 사회생활의 일상에서 반드시 실용이 합목적에 따라 발전을 하다가 실용과 수식(修飾)이 적절히 결합함에 그 끝에 이르러 허식(虛飾)에 빠지는 것이라고 하고서, 거기서 자연스런 예술성의 발로를 발견할 수 있다고 했다.

이어서 공예미술을 자유미술과 구별했는데, 자유예술은 사회와 유리된 경향을 갖고서 천재주의·개인주의의 개성미(個性美)를 갖고 있지만 공예미술이야말로 사회미(社會美)·단체미(團體美)를 구현하는 것이어서 그것이 속한 그 사회의 성격을 그대로 볼 수 있다고 했다.

선생은 공예미술을 통해 종교와 계급의 결합을 추론하여 "계급사회의 발전에 부응하는 형식변천"을 파악하는 방법을 구사했는데, 특히 고려청자에 대한 변화의 단계를 설명해 나감에 있어 충렬왕(忠烈王)의 호사 취미에 따른 화금청자(畵金靑瓷)의 발생을 논했다.

또한 상감청자와 분청사기에 대한 그 다채롭고 풍부한 서술은 여전히 노작(勞作) 바로 그것에 이르렀다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선생은 청자에 새겨진 시명(詩銘)과 전적(典籍)의 기록을 찾아 시화일치(詩畵一致)의 감상법을 요청하면서 자기를 사용할 당시를 연상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가르쳤다.

 

   
▲ 국보 제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 위대한 유산 … 그리고 숙제
1941년 9월15일 선생은 진찰을 받고 돌아와 쓴 일기에 "나도 앞으로 잘해야 십 년 남짓 수명이 남은 모양"이라고 한 이래 사흘 뒤인 18일에는 춘추사의 원고 청탁을 받고서 절필(折筆)해야겠다고 느낄 만큼 기진맥진했다. 그리고 자신의 간장경화증(肝臟硬化症)이 간장암(肝臟癌)으로 번질 것이라 예언하는 가운데 "그러하면 결국 나의 운명은 결정되고 만 것이리라. 죽음은 두렵지 않다 하나 생에 대한 다소의 미련이 없는 바 아니며…"라고 하다가도 "죽게 되면 역시 태연히 죽어 버릴 수밖에"라고 했으되 끝내 세키노 다다시(關野貞)가 『조선의 건축과 예술』을 간행했다는 소식을 듣고서 다음과 같은마음을 쏟아냈다.

"나도 조선미술사를 내고 싶은 마음이 든다. 그러나 재료 부족, 참고서 부족에도 실로 어쩔 수 없다. 쓰면 세키노 다다시 박사 저(著)의 유(類)가 아닐 것이지만…."

참을 수 없는 열정으로 혼신을 다해 왔으되 병마(病魔)의 절벽 앞에서 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절망의 암흑을 향해 나아가던 시절, 선생의 운명은 요절을 향하여 가고 있을 뿐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었다. 불후의 노작을 쏟아내신 선배 오세창(吳世昌) 선생이야 학계로부터 은퇴하신 지 오래요, 온통 일본인뿐인 조선미술사학 동네는 고유섭이란 이름이 있어 서로간에 긴장감으로 학문의 균형과 조화를 이뤄내고 있던 때였다.
선생이 세상을 떠나심은 아무런 학연 없이 홀로 걸어 뿌리내리기 시작하던 윤희순(尹喜淳) 김용준(金瑢俊) 선생으로 하여금 가시밭길을 이어 가라는 뜻이었을까.

청년 황수영(黃壽永)과 진홍섭(秦弘燮)이 문하에 드나들고 있어 한켠으로 든든하였으되 이들 무릎제자는 너무 어려 미래를 약속할 수 없었다. 하지만 개방과 자득의 학풍을 일으켜 세우신 선생이었으니 제자가 아니더라도 그 누군가 조선미술사학의 위대한 성취를 이룩할 수만 있으면 그뿐이라 생각하셨을 게다. 선생이 세상을 떠나고서 언젠가 학연이니 문하(門下)니 하여 법통(法統)을 논하고 대학 거점을 근거 삼아 정통과 재야를 따짐은, 그러므로 여래(如來)의 품처럼 그윽하여 끝도 가도 없었을 선생 앞에 부끄러운 일이다.

이제 아득히 멀리 떨어진 어느 외진 땅에서 선생의 이름 오직 존경심만으로 우러르고 있는 내 눈에는 걱정이 가시지 않는다. 하나는 선생께서 세상을 떠나신 뒤 반세기 동안 숱한 유물 발굴과 문헌 조사가 이뤄졌고 또한 사관과 관점에서도 거듭났으니 새로운 성취를 덧붙이는 주석(註釋)의 절심함이다. 하지만 쉽지 않는 일이다. 나설 이도 드물겠지만 몇몇 사실 교정과 관점 수정이 주요한 게 아니라, 동서융합을 터전으로 삼아 이룩한 방법론과 통찰력의 풍요로움을 따라가지도 못하는 처지임을 깨우치는 게 먼저가 아닌가 한다.

그렇다. 선생께서 남겨 두신 풍요로운 방법론은 어디론가 사라졌고 개방과 자득의 학풍 또한 감춰져 있을 뿐이다. 아예 그게 잇는 줄조차 모르고 있거나와, 사학 동네 안팎이 개방과 자득의 바람으로 한껏 물들었다면 오늘의 한국미술사학이 어찌 여기에 머물러 있었겠는가.

실로 선생의 뜻을 이어 잠시 멈췄던 숨결 되살림에 해방 직후 문외(門外)의 학계에서 윤희순·김용준이 연이어 노작을 간행했고 도한 문하에서 제자 황수영과 진홍섭이 스승의 저술을 엮어 간행했으니, 오세창에서 시작하여 고유섭을 일으켜 세운 20세기 조선미술사학의 별자리가 밤하늘 북두(北斗)와도 같이 눈부신 빛깔 그대로다. <『우현 고유섭 전집』2, 「조선미술사 하·각론편」, 열화당, 2007, P.10~16>

/이기선(미술사가) soljae@hanmail.net

인천일보, 인천문화재단 공동기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