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관문서, 제물포지도 그리고 D.39
김성수 해관사료 수집 연구가(서울본부세관 감사담당관실)

지난해부터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장소를 둘러싸고 오랫동안 논란이 계속돼 왔다는 사실을 지면을 통해 알고 있었다.

관세청에 몸담고 있으면서 해관역사에 대해 나름대로 관심을 가져온 필자로서는 체결장소를 주장하는 근거가 '인천해관' 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인천해관관사 주장, 일관·구체적

먼저, 화도진이라는 주장의 근거를 따져보았다.

향토사학자 고 최성연 선생의 '화도진'이라는 주장은 꽤 오랫동안 정설로 굳어져 오고 있었고 전문가들의 참여하에 '검증'까지 곁들어져 화도진이 복원되고 관련 전시물까지 설치되었다.

그러나 최성연 선생이 들고 있는 근거(The Korea Review Vol. 1)를 살펴보면, 그다지 어렵지 않게 오히려 화도진이 체결장소가 아닐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에 비해 인천해관세무사(이하 인천해관)관사라는 주장의 근거는 매우 선명하고도 구체적이다.

1892년 2월호 쿠퍼(Cooper)선장의 진술과, 제1권에서 다룬 기사는 결론이 동일하므로 여기서는 헐버트가 편집책임을 맡았던 제1권 'The new century'라는 기사의 소제목 '제물포'(Chemulpo) 부분의 기사일부를 참고한다.

...(전략) When the first treaty with a western nation was negotiated by Admiral Shufeldt on May 22nd 1882, a tent was erected for him on the hill-side at Chemulpo back of what is now the Commissioner's residence and...(후략) The Korea Review Vol1 (1901. 1월호 12페이지)
1882년 5월22일, 서양국가와의 첫 조약이 슈펠트 제독과 교섭되었을 때, 그를 위해 제물포 현재 인천해관관사 뒤 언덕위에 텐트가 세워졌다.

또 알렌이 쓴 그의 <한국연대표>에서는 위와 유사한 내용이 다시 언급되지만 추가 정보까지 확인할 수 있다.

The treaty between the United States and Korea was signed at Chemulpo in a temporary pavilion. (The exact spot is said to be now occupied by the residence of the Commissioner of Customs, which ground was originally allotted the U. S. government of a Consular site and the present house was erected by an American C. H. Cooper, for a Consulate, but was afterwards surrendered by the U. S. Government)
미국과 조선 사이의 조약이 제물포의 임시로 친 한 텐트에서 서명되었다. (정확한 지점은 현재 해관세무사 관사가 들어선 지역이라고 하는데 그 곳은 원래 미국정부의 영사관터로 할당된 곳이었고 영사관 용도로 미국인 쿠퍼(C. H. Cooper)가 현재의 건물을 지었는데 나중에 미국정부는 권리를 넘겼다)

헐버트와 알렌은 둘 다 미국인으로서 2년 차이로 각각 선교사로 파견되었다. 낮선 조선에서 누구보다 잘 아는 사이였을 것이다.

중요한 정보도 서로 교환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더구나 글을 쓰던 당시 알렌은 미국을 대표하는 외교관 신분이 아닌가?

또 조약체결장소에서 멀지 않은 곳에 별장까지 지었으니 글의 신빙성까지 높여주지 않는가?

그럼으로 헐버트가 기사작성에 관여한 에 등장하는 그 기사는 거의 알렌에게서 얻은 사실을 토대로 작성한 것으로 보아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알렌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부지의 원래 용도와 건물에 대해 이력까지 덧붙여 사실감 마저 높여 주고 있다.


▲미국영사관터 = 인천해관관사, Foote 공사 약도, 감리서 공문 확인

그런데 그 부지에 대해서 다행스럽게 조선의 기록도 남아 있었다.

1884년 5월17일(음) 정부에서 인천감리에게 발송한 공문을 보자.

照得本港租界內美國領事館基址 以華商租地北邊 四面五十方米突爲定 此係美國全權大臣 來本衙門 當面妥商 已經允諾 向後領事館建造材料 現方運到 不日開工云 到卽知照海關 査驗行宜當者
본항(인천항) 조계지내 미국영사관 건물의 부지로서 청국조계지 북쪽 가로 세로 50미터를 정했는데 이것은 미국의 전권대신이 우리 아문에 와서 협상한 것에 따른 것으로서 이미 승인했으니 향후 영사관 건물을 짓기 위한 자재들을 이곳으로 운반하여 곧 공사를 시작한다고 하므로 곧 인천해관에 알려주되 화물검사는 마땅히 시행한다. [84. 5. 17(음) 八道四都三港口日記]

또, 제물포에서 조계부지가 확정되어 가던 1884년 4월30일 미국공사 푸트(Lucius Harwood Foote, 한자이름 福德)는 자신이 직접 영사관터를 선정한 것에 대해 미국무부에 보고하고 직접 그린 약도를 첨부하였는데 그 형태는 다음과 같다. <지도1 참조>


   
▲ <지도1>1884년 4월28일 미국공사 Foote가 그린 약도.

이 약도는 1884년 4월28일 그린 것인데 마이크로 필름형태로 되어 있으며 필자가 독립기념관 자료실에서 가져온 것이다.

제목은 "Proposed Plan Town of JENCHUAN COREA"이다.

상단에 필자가 사각형으로 표시한 지역은 작지만 분명히 영문으로 "Selected for American Consulate"라고 적었다는 것을 판독할 수 있고, 부지규격을 가로 세로 길이를 각각 164 Feet(약 50m)라고 적음으로서, 인천감리에게 발송한 공문 내용과 일치함을 알 수 있다.

작성한 날짜는 조선정부에서 발송한 문서보다도 무려 50일 정도나 빠르다.

다만, 아쉽게도 부지등급과 번호가 그의 공문이나 이 약도에 전혀 나타나지 않아 아직 이곳이 1888년 인천제물포 각국조계지도에 나타는 D.39로 단정하기에는 성급하다고 판단했다.

미국은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한 이후 서울에 공사관을 설치하였지만, 개항장으로서 뿐 아니라 전략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곳에 위치한 제물포에 영국, 일본, 청나라가 앞다투어 영사관을 설치하는 것에 유의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조약체결 후 2년만에 영사관 추가 설치를 위해 서둘러 조선정부와 교섭한 끝에 부지를 확보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정작 신속히 부지를 확보한 이후 미국영사관은 다소 의외의 행보를 보인다.

조선정부의 공문에서 나타난 바와는 달리 부지확보를 한 이후 미국은 공관 건축을 위해 직접 나서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다.

이것은 아마도 미공사관 생각과는 달리 본국에서는 제물포에서 영사업무의 필요성을 크게 느끼지 못해 승인을 하지 않은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여기서 알렌이 실명으로 거론하고 있는 쿠퍼(C. H. Cooper)란 인물에 대해 좀 더 알아볼 필요가 있다.


1886년의 딘스모어(Dinsmore 1887년부터 2년 동안 주조선 미국공사를 지낸 의사)의 쿠퍼(Cooper) 사망보고에 따르면 그는 미국 뉴욕 킹스턴 출신의 상인으로서 풀네임(Full Name)은 찰스 헨리 쿠퍼(Charles Henry Cooper)이다.

따라서 그는 슈펠트 제독과 함께 온 스와타라 호 선장 쿠퍼(Cooper)와는 전혀 다른 인물이다.

폐결핵으로 사망할 당시 그의 나이를 60세로 기록하고 있으니, 1884년에는 54세의 적지 않은 나이였다.

푸트( Foote)공사는 1884년 6월5일자 보고서에서 그와 맺은 협약(84년 5월21일)을 사본으로 첨부하였는데 주요 본문 내용은 다음과 같다.

You are hereby authorized to erect your house, 42 × 48, feet in size, upon the lot selected for the United States Consulate, upon the condition, that you shall pay all money assessments which may be levied hereon, and that the United States Government shall at any time have the privilege of purchasing the same at a fair valuation, or rent the same at a fair price.
우리는 미국영사관 용으로 선택된 부지 위에 귀하가 제세비용을 부담하는 것을 조건으로 42 × 48 feet 규모의 주택 건축을 승인합니다. 미국정부는 언제든지 공정한 평가가격으로 그 건물을 매입하거나 임대할 권리를 갖습니다.

 

   
▲ 인천해관세무사관사는 본래 미국영사관 자리였으나 건물을 지은 뒤 영사관으로 사용되지 않았다. 이후 1889년 이전부터 인천해관세무사관사로 사용돼 왔다. 사진은 1880년대 중반 인천해관세무사관사의 모습. /자료제공=해관사료 수집연구가 김성수씨


▲美, 영사관 짓지 않고 매각

즉, 미국 영사관 부지위에 쿠퍼의 주택이 들어선 것이다.

건축에 소요된 비용도 쿠퍼의 자금이었다. 그리고 건축조건은 필요시 언제든지 미정부가 사들일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1885년경 완공된 그 멋진 건물(Fine Building)을 쿠퍼는 자신의 주거용으로 생각지 않았던 모양이다.

미공사관에서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자 쿠퍼는 건물처분에 나서게 되는데, 1886년 1월29일자 미국무부에 보고한 문서에 따르면 그는 처분이 여의치 않자 러시아와 접촉해 매매계약을 추진하다가 미공사관의 반대에 부딪치게 된다.

쿠퍼 사망 이후 17년이나 세월이 흘러 의료선교사에서 주한미국총영사라는 외교관 신분이 된 알렌은 1903년 미국무부에 장문의 보고서를 제출하는데 여기 그 건물의 행방에 대한 중요한 내용이 들어있어 그 일부를 인용한다.

In accordance with precedent the United States could reserve a consular site at Chemulpo providing all such sites have not been reserved before action is taken.
The price would not be great. At one time we owned a fine site at Chemulpo as a gift from the Korean Government, on which an American had erected a good house for the use of a consul. No such officer having been appointed, the site was given up and the same was acquired by the Korean Government as a residence for the Commissioner of Customs, who bought the house of the American. C. H. Cooper.
선례에 따라서 미국정부는 조치가 취해지기 전, 유보되지 않는 모든 부지를 공급하는 제물포 소재의 한 영사관 부지를 유보할 수 있었습니다. 가격은 비싸지 않았습니다. 동시에 우리는 제물포에 조선정부에서 선물로 받은 좋은 부지를 하나 취득했는데, 부지 위에 한 미국인이 영사관 용도로 좋은 주택을 건축했습니다. 미국정부에서 직원을 임명하지 않아 그 부지를 포기하게 되어 조선정부가 인천해관관사용으로 취득하게 되었는데, 그 집을 구입한 사람이 바로 쿠퍼(C. H. Cooper)입니다.


▲인천해관관사터로 조선이 다시 매입

필자는 여기서 대조선인천제물포각국조계지도에서 D.39 필지를 찾아보았다.

그 지역은 청국조계지 위에 위치해 있고 각각의 길이가 대략 57m, 59m 정도의 사각형 부지였다.

이 정도면 인천감리에게 보낸 공문에서 설명하는 사방 각 50미터인 규격과 유사하고, 또 청국조계지 위에서는 가로 세로 길이가 같은 반듯한 사각형 형태의 부지는 오직 이곳에서만 찾을 수 있을 뿐이다.

또 알렌이 이야기하고 있는 쿠퍼를 실명으로 찾았다는 것과 그가 건축하려한 건물의 용도가 여러 공문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는 점, 이후 조선정부가 인천해관관사로 쿠퍼(Cooper)에게서 취득하게 되었다는 점을 납득할 수 있게 되었다.

알렌이 이야기하고 있는 내용들이 모두 사실로 드러나는 것이다.

이번에 발굴한 제물포지도는 해관에서 작성한 스케치로서 D.39 필지의 용도를 분명히 알려주고 있다.

게다가 추가로 영문과 한문으로 이곳이 인천해관관사라는 것을 친절히 알려주고 있으니 더 이상 의심할 여지는 없지 않는가? <지도2 참조>

 

   
▲ <지도2>새롭게 발견된 제물포지도(Sketch of Chmulpo Enclosure in Jenchuan No 6 of 10 Jenuary 1889 to Seoul)에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장소인 인천해관관사터'稅務司公館'(세무사공관)과'D lot No 39'라는 필지번호가 선명하게 표기돼 있다. /자료제공=해관사료 수집연구가 김성수씨


▲지도·사진 모두 확인

불현듯 나는 2007년경 수집한 제물포 파노라마 사진에서 쿠퍼(Cooper)가 지은 건물의 실체를 확인하고 싶어 사진을 뒤지기 시작했다.

추적 단서는 1885년경이라는 시간, 산 중턱에 큰 도로가 인접한 모퉁이라는 입지, 미국인이 지은 양관이라는 건축양식. 마침내 나는 언덕위에서 문제의 그 건물을 찾아 낼 수 있었다.

짜릿하고 가슴 떨리는 순간이었다. <본보 1면 사진 참조>

비록 영광스럽게도 한 가지 숙제를 내가 해결하게 되어 홀가분해졌으나 의도하지 않은 또 고민거리를 인천지역사회에 주게 되었다.

그것은 화도진에, 파라다이스호텔 입구에 각각 세워져 있는 기념 표지석과 각종 기록물의 정정이다.

우리는 바른 일을 위해서는 때로는 용기와 대가가 필요함을 알고 있다.

진실을 알고도 침묵하고 있다면 그것은 무책임이자 역사왜곡에 묵시적으로 동의하는 것에 다름아니다.

또 나는 여전히 다른 과제를 수행중이다.

지금까지 해 온 해관문서의 추적과 그 연구가 바로 그것이다.


어쩌면 근대사, 개항사의 많은 의문을 풀 수 있는 열쇠가 이들 문서속에 숨겨 있을지 모를 일이다.

앞으로 수집된 해관문서의 공개를 통해 많은 뜻있는 연구자들의 자발적 참여가 이어지고 토론과 연구가 활성화되어, 조선 근대화를 이끌었고 기여했던 해관이라는 조직이 조명받고 재평가받아 우리 역사교과서의 한 페이지에 실리기를 개인적으로 간절히 희망한다.

또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것이 계기가 되어 활발히 개항사가 논의되는 자리가 만들어지고 이것이 우리 인문학 발전에 기여할 수 있게 된다면야 더 이상 무엇을 바라겠는가.



■김성수씨는…


관세공무원 27년차

2006년 공부왕 선정


김성수 씨는 1964년 서울태생으로 86년 국립세무대학 관세학과를 졸업하고 그해 관세청에 임용돼 근무해왔다.

올해 관세공무원 27년 차인 김 씨는 2004~2006년 일본KPMG세리사법인에서 국제이전가격 분야를 연구했으며 이후 서울세관 심사부서와, 관세청 평가분류 분류담당 팀장으로서 근무했으며 현재 서울본부세관 감사담당관실에서 감사1주무로 근무중이다.

2006년엔 한 전국경제지의 직장인 공부왕으로 선정될 만큼 연구에 매진하는 인물이다.

저서로는 (2007) 영인을 번역 출간(서울세관)했으며 서울세관100주년기념사진첩(서울세관)을 발간했다.

이와 함께 <사진으로 보는 한국세관 130년 및 동 추록>(2007년·관세청), 올해 <부산해관문서>(관세청) 영인, 번역본을 발간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