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도 죽는 걸 가끔 생각합니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 거의 모든 사람이 수를 다하고? 죽듯이, 죽음을 앞두고서 요양병원 신세를 져야 하는지. 사고로 죽게 된다면 많이 아플 텐데… 만약 혼수상태가 되면 어쩐다지? 그렇게 된다면 장기기증을 하면 좋을 텐데, 뭐 다 낡아 버려서 쓸만한 것이 얼마나 남았으리라고. 운이 좋아서 자다가 한 방에 꼴까닥 죽으면 좋으련만. 노인들이 수군거리는 걸 들었는데"참 복도 많아~ 그렇게 쉽게 가다니… 자손들 고생 안 시키고, 나도 그렇게 가면 좋을 텐데."어떻게 죽을 것인가! 이것은 텔레비전에서 상조회사 선전을 볼 때마다 떠오르는 생각이다. 2011 김충순. 켄트지 210X290㎜ 연필, 수채.

초이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나는 초이의 헝클어진 머리에서 그 남자의 냄새를 맡았다. 초이의 불그스레한 목덜미에서 그 남자의 입술이 스쳐간 흔적을, 그리고 흔들리는 초이의 눈동자에서 다른 남자가 준 새로움의 충격과 설렘을 읽었다.

나는 짐승처럼 초이를 침대 위에 쓰러뜨리고 그녀와 섹스를 했다. 아무 우리 두 사람이 함께 경험한 수백 수천번의 섹스 중 가장 슬픈 섹스였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섹스를 하면서 울었다. 초이 역시 눈물을 흘렸다. 나는 손으로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이제 다시는 그 남자 안 만날 거야."

초이가 말했다. 하지만 나는 정색을 하고 초이의 말을 반박했다.

"계속 만나. 하고 싶을 때마다 그 남자와 해도 돼."

초이는 내 눈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이 복잡한 감정으로 요동쳤다.

"진심이야? 정말 내가 그러길 바래?"

나는 초이의 말 속에 들어있는 날카로움을 느끼고 순간적으로 움찔했다.

"진심이야. 물론, 나도 남잔데, 초이가 다른 남자와 자고 들어오는게 좋겠어? 잘 알잖아. 내가 그런 변태는 아냐."

"솔직히 말해봐. 내가 싫어진거야? 나에게 싫증이 나서, 다른 여자 만나려고 나를 일부러 다른 남자와 자게 하는거야?"

"그런게 아니라는거 잘 알잖아."

"모르겠어. 난 정말 모르겠어."

"난 다만 내가 갑자기 죽었을 때 초이가 이 세상에 외롭게 혼자 남지 않기를 바랄 뿐이야."

"지금 당신의 이런 행동이 얼마나 무책임한건지 알기나 해? 그건 나를 인간적으로 모욕하는 거라고. 진짜 나를 사랑한다면, 당신이 죽을 때까지 내가 당신 곁에 있도록 잡아줘야 하는거 아냐? 그런 게 사랑이잖아. 말해봐. 왜 나를 이렇게 망가뜨리는지. 내가 처참하게 망가져서 길거리의 돌멩이처럼 이 남자 저 남자의 발끝에 채여 굴러다니기를 바라는거야?"

나는 할 말이 없었다. 나 역시 괴롭기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내가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그런데 내 욕심만 차리겠다고 이렇게 아름다운 초이를, 평생 가장 빛나는 순간을 맞이한 초이를, 시들어가게 할 수는 없었다. 죽을 때까지 초이를 내 곁에 붙잡아둔다는 것이야말로 이기적인 행동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초이가 만나는 다다라는 남자를 나는 보고 싶었다. 초이가 그 남자를 만나러 간다고 했을 때 사진을 한 장 찍어오라고 했다. 초이는 꼬리엔떼스 대로와 사르미엔토가 만나는 곳에 있는 밀롱가 뽀르떼뇨 이 바일라린에 갔다온 후, 핸드폰에 저장된 사진을 보여주었다. 초이의 핸드폰 속에는 라우라와 가르시아, 그리고 일본인 친구 등과 함께 찍은 여러 장의 사진이 들어 있었다. 나는 여러명이 함께 모여서 둘러앉은 사진을 보고 한눈에 다다라는 남자를 알아보았다.

"이 남자지?"

초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진 속의 남자는 나의 십년전 모습과 너무나 닮아 있었다. 나는 그 사진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휴대전화 액정화면이 어두워지자 다시 손가락을 터치를 해서 화면을 밝게 만들었다. 그 남자는 나를 알고 있을까?

초이는 아마 다다도 나를 알고 있을거라고 대답했다. 초이를 사이에 두고 십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내가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우리는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지만, 우리는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 나는 그날 이후로 다다라는 남자에 대해 초이에게 말하지 않았다. 초이 역시 일부러 다다 이야기를 꺼내지는 않았다.

그런데 다다가 한국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다시 부에노스아이레스로 온다고는 했지만 영원히 오지 않을 수도 있다. 초이와의 인연, 그리고 초이를 매개로 한 나와의 인연이 여기서 끝날 수도 있었다. 다다가 한국으로 돌아간 석달동안 나는 초이에게서 아무런 변화를 읽을 수 없었다. 우리는 평상시처럼 함께 일어나 식사를 하고 나는 회사에 출근했으며 초이는 늦잠을 자다가 시장을 보고, 혹은 부에노스 시내를 어슬렁거리며 산책을 하고, 나의 퇴근시간에 맞춰 저녁을 차려놓았고, 저녁 먹고난 후 주말 저녁에는 교외의 작은 밀롱가를 돌아다녔다.

우리는 여전히 행복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세상은 태평했다. 뉴스에서는 기차가 탈선하고 한 여름에 우박이 떨어지기도 했지만 초이와 나의 세계는 무사태평했다. 참으로 따뜻하고 안온한 날들이 흘러갔다.

석달이 지난 어느날 밤, 초이는 저녁식사를 마치고 맥주를 한 잔 하자고 했다. 그녀가 가져온 것은 평소처럼 와인이 아니라, 낄매스 흑맥주였다. 달콤함과 강렬한 향이 특징인 흑맥주 낄매스를 마시면서 나는 불현듯 다다라는 남자를 떠올렸다. 그 남자가 이 맥주를 아주 특별히 좋아한다고 언젠가 초이가 했던 말이 기억난 것이다.

"다다가 부에노스에 오는거니?"

"응. 역시 감각이 빨라."

"직접 연락왔어?"

"아니. 가르시아가 알려줬어."

"언제 도착하는데?"

"일주일 후."

나는 아무 말없이 낄매스 맥주를 세 병을 비웠다. 초이는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었을 것이다. 나는 이제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시기가 너무나 절묘했다. 내 병이 깊어가고 있었다. 나는 일주일 전 담당 주치의로부터 간경화가 심각한 상태에 도달했다는 말을 들었다. 내 얼굴은 일년 전의 사진과 비교해봐도 같은 사람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퉁퉁 부어 있었다. 배에는 복수가 차고, 자고 나면 손발도 퉁퉁 부어올랐다.

나는 이렇게 망가진 채 죽음을 맞이하기는 싫었다. 북극이나 남극같은 곳으로 혼자 떠나서, 수면제를 먹고 자는 듯 죽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 굶주린 겨울 들판의 야생동물들이 내 사체를 뜯어먹으며 한 겨울을 배부르게 지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더 이상 망설이지 말자고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이제 정말 떠날 시기가 되었다. 나는 내 삶의 마지막을 서서히 준비했다. 가르시아에게 부탁해서 콜롬비아 출신 건달에게 연락이 닿는지 알아봐달라고 부탁을 했다. 중요한 것은 디데이였다. 다다가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돌아오는 날로 디데이를 잡았다. 그것은 운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