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천지방법원 판사 엄철

형사재판에서 유·무죄의 판단이 주요한 부분을 차지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피고인의 형량을 정하는 일도 형사재판을 담당하는 법관들이 밤늦게까지 사무실의 불을 밝히는 이유다.
어떻게 보면 형사재판을 받는 피고인들로서는 결국 자신이 받게 될 형이 얼마가 될 것인가가 중요한 문제일 것이다. 과거 경험 상 어떤 피고인은 징역형의 집행유예를 무죄선고로 오해할 정도로 구속상태에서 풀려나는 것을 큰 의미로 받아들이는 경우도 있었다.
집행유예란 법원의 형 선고 시 일정기간 형의 집행을 유예하고 그 기간이 지났을 때 형의 선고가 효력을 잃게 하는 제도다. 다만 집행유예 선고 시 함께 명하게 되는 보호관찰, 사회봉사 수강명령을 이행하지 않는 경우 검사의 청구로 집행유예가 취소될 수 있고 집행유예 기간에 고의로 죄를 범해 금고 이상 실형을 선고받아 판결이 확정되는 경우 집행유예 선고가 자동실효돼 유예된 형이 집행될 수도 있다.
피고인 특히 구속된 피고인에게는 집행유예의 선고가 재판부의 선처로 여겨질 수 있지만 위와 같이 집행유예가 취소 또는 실효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비록 당해 범행으로서는 선처의 여지가 있다 해도 가정환경 등 피고인이 처한 상황에 비춰 재범 가능성이 있거나 보호관찰 등을 잘 이행하지 않을 것으로 의심되는 경우 법관으로서 쉽게 판단을 내리기 어려운 경우가 있다.
일례로 형사재판을 하다 보면 보호자가 없거나 있더라도 실질적인 보호를 받을 수 없는 불우한 가정환경의 미성년 피고인이 아르바이트를 하던 편의점 물건에 손을 대기 시작하면 선처를 받더라도 쉽게 이런 행위를 그만두지 못하는 경우를 자주 보게 된다. 대개 그런 피고인은 소년법상 소년보호처분 및 몇 회의 벌금형을 거쳐 구공판 피고인으로 법정에 서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이때 그 피고인의 정상을 고려, 징역형의 집행유예를 선고할 경우 상당수 피고인은 유예기간 중 재범으로 다시 법정에 서게 되고 그러면 법관으로서는 징역형의 실형을 선고할 수밖에 없어 결국 그 피고인으로서는 유예된 형과 새로 선고받는 형 그리고 종래의 벌금형에 대한 노역장 유치를 함께 집행받게 돼 애초 실형을 선고받음으로써 재범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경우보다 형이 무거워지는 때가 자주 있다.
이러한 과정을 다소 줄여보고자 판결 선고 시 특히 나이 어린 피고인들에게 집행유예의 위험성을 늘 강조하고는 있지만 재범으로 다시 법정에 서는 피고인을 대할 때면 가끔씩 '선처'라는 단어에 대한 근원적인 의문을 가지게도 된다.
결국 피고인의 마음가짐에 기대할 노릇이겠지만 다음 선고기일에도 다시는 법정에 서지 않도록 다짐을 받으면서 유감스러운 집행유예를 선고할 수밖에 없을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