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우성의 미추홀( 568 )
인천체육회가 정식 발족한 것은 1950년 6월 10일이었다. 그 보름 뒤 전대미문의 동족상잔이 벌어질 줄은 꿈에도 모른 채 정용복 선생을 위시한 여러 인사들이 의기투합하여 조직한 최초의 명실상부한 체육 단체였다.
그와 동시에 경기도체육회도 구자옥 경기지사를 초대 회장으로 추대하고 사무실을 도청 문정과(文政科) 안에 두면서 발족했다. 그러나 업무의 대부분은 당시 도내 제1의 도시였던 인천에서 도맡아 꾸려 가고 있었다.

제1회 경기도체육대회를 1955년 9월 13일 인천공설운동장에서 열게 된 것도 시세나 체육계 역량에 의해 자연스럽게 이뤄진 것이었다. 그 후의 대회도 대개 인천서 열렸는데 매년 기다렸던 흥겨운 한마당 잔치였다.
공설운동장 육상 경기장을 가득 메운 인천 시민과 남녀 고교생들의 응원가(특히 월미여상의 응원가가 인기 있었다!), 펄럭이는 깃발과 플랜카드, 삼삼칠박수 딱딱이 소리와 함성 속에 지는 해가 아쉽게만 여겨졌었다.

지금에 돌이켜보면 그 같은 열기와 환희와 성원에 힘입어 인천 체육이 성큼성큼 성장해 갔던 것이 아닐까 싶다. 백옥자, 천순임(투포한), 모명희, 박미선, 이영순(육상) 같은 발군의 여자 선수들이 날렸던 배경이었다.

그러나 1981년 직할시 승격으로 경기도체육회가 인천 이전 20년 만에 수원으로 옮겨가자 거시적 체육대회의 맥도 끊기고 말았다. 반면에 경기도는 그를 승계해 제56회 경기도체육대회를 열고 있는 중이다. 아시안게임 개최지로서 정례 '체육대회' 하나 없다는 건 부끄러운 일이다. 대회 신설을 재고했으면 한다.

/객원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