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수군은 진관(鎭管) 체제로 유지돼 왔다. 영종진, 화도진 등은 지금의 인천항 일대를 지키는 해군사령부의 이름이었다. 예들어 영종진은 유사시 임금의 강화도 피난길을 확보하기 위해 효종 때(1653년) 설치한 것이다.

그러나 19세기 인천 앞바다에서 벌어진 병인양요, 신미양요, 운양호사건 때 비록 조선은 척화비를 세워가며 의기양양해 했지만, 사실은 수군이 이양선의 대포 앞에서 전패를 면치 못하는 수모를 감내할 밖에 없었던 것이다.

1882년 김영효가 "개항지역에 수영을 설치하고 외국교관을 초빙하여 장병을 훈련시켜 해방(海防)을 견고히 하자"고 한 것이나, 고경문이 "인천항에 해군을 창설하라"고 임금에게 상소했던 것은 바른 현실인식의 결과였다.

최초의 해군사관학교가 강화 갑곶진에서 문을 연 것은 1893년 10월이었다. 그러나 일본의 방해공작으로 곧 폐교되었고, 조선정부가 사상 처음 마련한 군함 '양무호(揚武號)'가 고물증기선이있던 것도 일본측의 농간이었다.

그 후 인천항에는 송도호(松島號), 낭속호(浪速號) 등 일본군함이 제집처럼 드나들었고, 인천조병창에서는 잠수함까지 건조하는 등 인천은 군국일본의 기지가 되어 있었다. 우리가 비로소 군함을 보유한 것은 1949년이었다.

미국서 사들인 450톤급 701호 '백두함' 그것이었다. 명실상부한 국산함정 제1호는 1972년 대한조선공사에서 건조한 72톤급 고속정이었다. 이번에 사고를 당한 초계정 천안함은 1989년에 건조되었다. 이지스함까지 건조한 성년 해군에 이런 참사가 벌어지다니 애통하다. 자중하는 마음으로 귀결을 지켜봐야겠다.

/객원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