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다시 3·1절이 왔다. 비관론자들은 우리의 독립이 세계 대전 승전국의 전리품으로 얻어진 것이라고 말하지만 결과가 그럴 뿐이다. 독립투사들의 치열한 항쟁을 더듬어 보면 우리는 민족적 자긍을 충분히 가져도 된다. 그 민족적 자긍의 중심에 3·1 독립선언과 만세운동이 있다. 그것이 없었다면 우리 역사는 얼마나 부끄러울까.
삼일절을 맞으며 이름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은 사람이 있다. 1919년 당시 종로경찰서 고등계 소속이었던 신승희(申勝熙) 형사다. 그해 39세였던 그는 함경남도 함흥 출생으로 밀정노릇을 하다가 10년 전 순사보로 특채된 뒤 종로경찰서에서 일하며 민족주의자들을 사찰했다. 밀정들을 거느리고 냄새를 맡아 독립운동가들을 체포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자료들을 보면 손병희, 한용운, 이상재, 윤치호 선생 등 거물급 지도자들이 그의 촉수를 피하기 위해 고심한 흔적들이 많다.
3·1 만세가 일어나기 사흘 전인 2월26일 저녁, 서울 인사동에 있는 천도교 소속 인쇄소인 보성사에서는 기밀문서를 인쇄하고 있었다. '오등은 자에 아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 그렇게 시작되는 독립선언문이었다. 어떻게 냄새를 맡았는지 신승희가 들어왔다. 인쇄된 선언문을 읽고는 한 장을 집어들고 나가 버렸다. 거국적으로 계획한 독립선언과 만세운동이 좌절되는 순간이었다.
보성사 사장 이종일(李鍾一) 선생은 황급히 손병희 선생에게 알렸다. 손병희 선생은 그날밤 신승희를 은밀히 찾아가 5천원을 싼 돈보따리를 내놓았다. 당시 쌀 한가마 값이 4원50전이었으므로 어마어마한 거금이었다.
"당신도 조선의 아들이 아니오? 이걸 받고 며칠만 꾹 눈 감아 주시오."
손병희 선생은 간곡히 호소하며 무릎을 꿇었다. 신승희는 돈 보따리는 쳐다보지도 않고 말없이 나가버렸다.
희망이 절반, 절망이 절반인 상황에서 3·1 만세운동 지도부는 3월3일 고종황제의 인산(因山) 날로 잡았던 거사계획을 초하루로 앞당겼다.
신승희는 서울 장안에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신의주에 독립단이 잠입했다는 정보가 있다고 하며 출장을 떠난 것이었다. 그리하여 3·1 독립선언과 만세운동은 계획대로 전개되었다.
신승희는 3월14일 밤, 경의선 열차를 타고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기다리고 있던 경찰에 체포되었다. 보성사 인쇄공들이 고문을 못 이겨 그가 다녀간 사실을 실토했던 것이다. 심문을 받고 유치장에 갇힌 그는 자정 무렵 미리 준비해 혁대 틈에 숨겼던 청산가리를 먹고 자살했다.
민족 반역자였던 신승희는 결정적인 순간에 민족을 배반하지 못하고 죽음의 길을 갔던 것이다. 독립선언서를 손에 넣은 직후 왜 보고하지 않았을까. 5천원의 돈 보따리를 두고 밖으로 나가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2월26일부터 목숨을 끊은 3월14일까지 17일 동안 어떻게 지냈으며 어떤 마음으로 극약을 준비했을까.
3월1일이 되니 문득 그의 마음을 상상하고 조용히 옷깃을 여미게 된다. '논어'에 있는 '견위치명 견득사의(見危致命 見得思義, 위태로움을 보고 목숨을 버리며 얻음을 보고 의를 생각한다)' 바로 그것이다. 그는 자랑할 만한 애국지사는 아니나 그런 속죄로써 자기를 버린 용기가 우리를 숙연하게 한다.
사람이 결심은 할 수 있으나 실천은 어려운 것이다. 3·1 만세시위 때 희생되거나 투옥된 수많은 분들도 결심을 실천한 분들이다. 민족정신이나 민족의 역량은 그런 이들이 실천한 견위치명의 희생 위에 자라는 큰 나무와도 같은 것이다. IT산업 세계 1위, 선박 건조량 세계 1위, 경제력과 무역량 세계 10위, 동계올림픽 5위, 그런 조국의 번영도 선열들의 거룩한 희생 위에 피어난 꽃인 것이다.
황금연휴에 들어 있는 아흔 번째 3·1절이다. 꼭 태극기를 달자. 하루만이라도 태극기를 바라보며, 조국을 지키기 위해 한 몸을 던져 견위치명을 실천한 선열들을 생각하자.


/이원규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