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통해 미래를 보는 여정(旅程) / 3 상해 100년, 아편전쟁 패배로 시작된 도시
1842년 홍콩을 출발한 영국 함대는 오송(吳淞)에 주둔하고 있는 청나라 군대를 공격하였다. 이곳을 수비하고 있던 청나라 군대는 강남제독(江南提督)인 진화성(陣化成, 1776-1842)의 지휘하에 있었다. 복건성 출신으로 일흔 살이 넘은 노(老)장군은 사력을 다해 용감히 싸웠지만 화력의 열세로 인해 장렬히 전사한다. 당시의 중국인들은 노장군의 모습을 그려 이를 오송순절도(吳淞殉節圖)라 했으며 집집마다 진 제독의 유영(遺影)을 모시지 않은 집이 없었다고 한다.

결국 영국군은 상해에 입성했다. 이들은 부자의 정원과 사묘(寺廟)를 주둔지로 사용하였고 목상 등을 부숴 취사용 연료로 태워버렸다. 영국 함대는 상해에서 장강을 거쳐 진강(鎭江)을 점령하여 갖은 만행을 저질렀다. 결국 남경마저 위태로운 지경에 처하자 청나라 정부는 항복하였고, 불평등하고 굴욕적인 남경조약을 체결하게 된다.
조약의 내용은 불태운 아편의 배상금 및 전쟁비용 전액을 중국 측이 지불하고 홍콩을 영국에 할양하며 광주(廣州), 복주(福州) 하문(廈門), 영파(寧波), 상해 등을 개방하고 영국인 가족의 거주를 허가하며 영국의 해당지역에 대한 감독관 또는 영사의 임명을 인정한다고 되어 있다. 이것은 장차 상해 조계(租界)로 발전하는 기초가 되었다. 따라서 1845년 영국이 상해에 조계를 설치하자 뒤따라 열강들은 자기 힘이 미치는 범위 내에서 조계를 설치하였다.

▲아편전쟁과 청일전쟁의 패배
청나라에는 만주족 조상 때부터 내려오는 삼궤구고(두 무릎을 꿇고 삼배하고 일어섰다가 다시 같은 동작을 되풀이하여 도합 세 차례 무릎을 꿇고 아홉 번 절하는 예)가 있는데 이것을 일명 고두(叩頭)라고 한다. 이것은 표면적으로는 의례의 문제이지만 그 이면에는 청 제국을 중심으로 한 천하질서에 대한 승인이며 중국문명을 기준으로 한 예의적인 행위가 된다. 따라서 이 예는 중국 황제가 면해줄 수는 있어도 그 예를 행하는 당사자가 회피하거나 면례요구를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영국을 비롯한 열강의 입장에서 보면 두 무릎을 꿇고 엎드려 절하는 것은 노예의 습관이나 오직 신에게만 행하는 것으로 여기고 있던 문화의식과 대영제국을 대표하여 제국의 존엄을 지켜야 한다는 외교관으로서의 소명의식이 청 황제 중심의 세계질서에 대한 승인을 상징하는 고두의 예와 충돌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따라서 청나라와 열강과의 외교는 언제나 고두의 예가 제일 먼저 풀기 어려운 문제로 등장하곤 했다. 그런데 중국 중심의 천하질서를 지켜보려고 안간힘을 쏟은 고두의 예가 깨진 것이 바로 청일전쟁(1894-1895)이다. 줄곧 주변의 속국으로 간주해오던 일본에 의해 중국이 위기에 처하여 더 이상 이전의 중국 중심의 천하질서를 유지하기 어려워졌다는 판단 때문이다. 즉 영국제국이 주도한 서구문명질서와 청 제국 질서 간에 헤게모니 투쟁은 아이러니하게도 같은 동양 국가인 일본의 무력에 의해 영국의 승리로 귀결되었다. 청나라는 1911년 신해혁명으로 왕조가 멸망한 것이 아니라 이미 그 이전에 고두의 예가 무너진 청일전쟁의 패배로부터 천하를 잃었고, 더 이상 세계의 중심에 있지도 않았다.
남경조약(1842)에서 영국에 패하고 곧이어 변방에 있는 섬나라 왜이(倭夷)에게조차 무릎을 꿇은 청나라는 이미 중화가 아니었다. 천하의 중심에서 밀려나 제 큰 몸을 스스로 추스르지 못하는 병자로 변했다. 이토록 불리한 상황에서 티베트고원에서 발원한 장강(5,800km)은 중국 내륙을 돌고 돌아 중국 동해안 중심부로 내려와 세계로 나가는 길목에서 상해가 일어난다. 비록 외세가 주도하는 조계로부터 시작된 곳이지만 가난한 노동자로부터 자유를 갈망하는 사람들, 혁명가, 출판인, 장사꾼, 사상가, 문인 등이 모여들어 새로운 중국을 잉태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땅에서 외세의 지배를 받는 고통스러운 일상이었기 때문에 자주독립의 정신은 더욱 커져만 갔을 것이다.

▲중국인과 개는 출입금지
사실 조계인구의 대다수는 여전히 중국인이었다. 1933년 도시 전체의 인구는 310만여 명이었는데 그 중 외국인은 7만 명 안팎이었다. 그런데도 1928년이 될 때까지 상해의 서양식 공원에는 "중국인과 개는 출입금지"라는 푯말이 붙어 있었다. 한 도시 안에서 함께 생활하는 중국인들과 서양인들은 일상생활과 휴식에 있어서의 내용이 극과 극을 달리고 있었다. 19세기 중엽에 이미 상해에는 우리가 근대도시 생활에서 접하게 되는 시설물의 거의 대부분이 건설되었다. 은행은 1848년부터 시작되었고, 서구식 거리는 1856년에 조성되었으며 가스등은 1856년에 설치되었고, 전기는 1882년에 가설되었다.
1881년에는 전화가 개통되었고, 상수도시설은 1884년에 공급되었으며 자동차는 1901년부터 거리를 달리기 시작했고, 1908년에는 전차가 시내 한 가운데를 질주했다. 20세기의 벽두의 상해조계는 서구의 기준으로 보더라도 근대도시의 하부구조를 이미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중국인들에게는 이 모든 것이 "처음에는 놀라고, 곧이어 이상하게 생각하고, 다음에는 부러워하고, 결국에는 본받지 않을 수 없는" 생활이 되었다. 그러나 중국인들이 서양 사람들처럼 살고, 그들이 가져온 각종 시설물에 접근하기에는 너무나 멀고 고된 삶이 지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