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 사도세자 잠든 화성서 노모 회갑연

순수 우리악기로 연주 '고유의 문화' 부각


행궁정문인 신풍루에 들어선다. 천천히 걸어서 중양문, 좌익문을 지나자 너른 마당이 드러난다. 정면으로 상당히 안정적이면서 품격이 흐르는듯한 고건축물이 눈에 들어온다. 건축물 이마에 '奉壽堂'(봉수당)이란 편액이 반짝인다. 혜경궁 홍씨의 회갑잔치인 '진찬례'가 펼쳐진 봉수당은 행궁 가장 안쪽에 들어앉은 행궁의 중심축이다. 조선시대 혁명적인 문화행사였던 진찬례의 의미를 아는 지 모르는 지, 20대 초반의 남녀가 사진을 찍으며 즐거워하고 있다.

신발을 공손히 벗고 봉수당 마루에 오른다. 왼편으로 혜경궁이 앉아 있다. 남편을 일찍 보내고 수십 년을 홀로 살아온 여인의 표정인 것일까. 아들을 마주한 그녀의 얼굴은 근엄해 보이면서도, 슬픔이 깃들여져 있다. 큰절을 올리기에 앞서 정조가 어머니에게 아뢴다.
"어머님, 오늘에서야 아버님이 잠들어 계신 곳에 오셨습니다. 아버님도 저희가 왔음을 아시고 매우 기뻐하실 줄로 아옵니다. 오늘만큼은 지나간 모든 근심걱정 다 멀리 보내시고 즐겁게 보내시기 바랍니다. 부디 만수무강 하옵소서."
왕실의 회갑잔치가 서울의 정궁이 아닌 궁궐 밖에서 열린 것은 조선왕조를 통틀어 화성행궁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정조대왕은 왜 이 곳에서 진찬례를 열었을까.
혜경궁은 28살에 남편을 여의고 홀로 정조를 키웠다. 그러면서 40여년 간 단 한번도 남편의 묘를 찾지 못했다. 정조가 화성에서 회갑연을 치른 것은 무엇보다 아버지 사도세자가 잠들어 있기 때문이었다. 정조는 어머니가 아버지의 묘소를 찾아 은원을 풀기를 바랐다. 선친과 생모를 만나게 함으로써 자식된 도리를 다하고 싶었던 것이다. 물론, 훗날 어머니를 모시고 살 화성이란 도시를 보여주고 싶은 뜻도 있었다. 정조는 혜경궁 홍씨 진찬례가 끝난 뒤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오늘의 의식은 실로 천년 만에 처음 있는 경사이다. 오는 갑자년(1804)에는 자궁께서 칠순이 되신다. 그 때도 현륭원에 참배하고 잔치하기를 오늘처럼 할 것이다. 오늘 사용한 반탁과 존작의 도구들을 화성부에 보관해 두었다가 10년 후에 경사가 거듭 돌아옴을 기다리게 하라."
정조는 1804년 순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그 때부터 화성에서 어머니와 함께 평생 거쳐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봉수당 진찬례는 오전 8시45분 시작됐다. 혜경궁의 여자 친척인 내빈 13명과 남자 친척 69명도 참석해 그녀의 회갑을 축하했다. 정조와 신하들은 차례로 술잔을 올리며 '천세!'를 외쳤고 그 때마다 춤과 음악이 터져 나왔다. 70여 가지의 음식과 42개의 상화(궁중잔치 때 바닥에 꽂는 꽃)를 앞에 한 혜경궁의 얼굴에선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봉수당 진찬례가 주목받는 것은 무엇보다 문화·예술적인 측면에서 '남존여비'의 권위와 형식을 깨트렸다는 점이다. 왕실잔치에서 남녀 예술인들이 한 무대에 선다는 것은 그 때까지 전대미문의 일이었다. 진찬례에서 맹인악궁과 여자무용수가 출연하는 '내연'과 남자악궁과 무동이 나오는 '외연'이 한 무대에서 어우러졌다는 사실은 정조의 남녀평등적 사고와 문화적 개혁성을 잘 보여주는 사건이다. 남녀가 함께 연주하고 춤을 추었다면 흥도 더 나고 공연내용도 풍성했을 것이란 사실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정조는 당시 악궁들로 하여금 중국악기를 쓰지 말고 순 우리악기로만 연주를 하도록 지시하기도 했다. 삼국지나 서유기 같은 중국소설을 싫어했던 그 였다. 우리 고유의 문화인 '진경문화'가 정조 때 발현했다는 사실은 그가 얼마나 자주적인 나라를 꿈꾸었는지를 잘 말해준다. 사람들이 등장하는 우리 나라 고유의 그림인 김홍도의 '풍속화'가 등장한 것도, 정조의 이런 마인드가 밑거름으로 작용했다. 봉수당 진찬연은 한마디로 기존 청나라의 문화를 과감히 거부하고 조선의 문화를 새롭게 꽃피운 시발점이라는 것이 화성박물관 김준혁(43) 박사의 설명이다. 그는 "정조는 남녀평등주의적인 사고를 갖고 있었으며 조선의 문화는 조선의 고유성에서 잘 피어날 수 있다고 인식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봉수당을 뒤로 한 채 앞마당을 바라본다. 지그시 눈을 감자 악궁들의 연주가 오케스트라로 피어오른다. 선녀의 승천 같은 독무와, 꽃잎이 피었다 오무라들기를 반복하는 듯한 군무가 카드섹션처럼 마당을 물들인다. 회한인가, 기쁨인가. 혜경궁의 눈가에 물기가 맺힌다. 그런 노모를 바라보는 왕의 검은 눈동자에도 영롱한 이슬이 반짝인다.
한 잔, 두 잔, 잔치가 무르익는다. 행궁 안에서도, 밖에서도 '여왕마마 천세, 대왕마마 천세!'가 울려퍼진다. 정조가 혜경궁에게로 다가간다. 왕이 어머니를 일으켜 세우더니 덩실덩실 춤을 추기 시작한다. 이 모습을 본 사람들도 하나 둘, 일어나 몸을 움직이기 시작한다. 화성은 어느덧 '성은의 노래와 춤'의 물결로 출렁인다.

/글·사진=김진국기자 blog.itimes.co.kr/freebird



■ 정조, 조선의 르네상스를 열다

화폭서 피어난 '우리 예술혼'

천재화가 김홍도·신윤복 두각

정조시대 가장 두드러진 문화혁명은 '그림'분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중국의 방식에서 벗어나 우리 산천을 그리기 시작한 조선 고유색이 숙종 때부터 나타나기 시작하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화가들은 여전히 중국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상황이었죠. 그러나 정조의 국가적 자부심에 맞춰 김홍도, 신윤복과 같은 화가들이 빛을 보았고 비로소 우리 산천과 백성들의 삶이 화폭에 담겨지기 시작했습니다. 화가들은 금강산이나 설악산 같은 산의 풍광을 사실적으로 그렸습니다. 또 장터에서 엿을 파는 사람, 씨름 하는 사람, 대장간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화폭에 담으며 새로운 화풍을 일으켰습니다. 김홍도는 특히 1771년 왕세손인 정조의 초상화를 그리기 시작, 1781년엔 '어진화사' 자격으로 정조를 그렸습니다. 이때문에 궁중화원으로는 처음으로 1785년 연풍현감을 제수받기도 했지요. 그는 인물화·신선화·불화 등 모든 그림에 능했고 특히 산수화·풍속화에서는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천재적 화가였습니다. 문화에서 뿐이 아닙니다. 정조는 우리 나라 28명의 국왕 가운데 가장 학덕이 높은 분으로 평가받고 있기도 합니다.
정조는 즉위하던 해인 1776년 창덕궁 후원에 규장작을 설치해 학술 정책 연구를 강화했습니다. 이듬해에는 서자들이 관직에 나갈 수 있는 법을 제정했습니다. 적자와 서자를 구분하지 않고 능력에 따라 인재를 등용한 것입니다. 이 때 뽑힌 인재들이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등과 같은 쟁쟁한 학자들이었죠. 이들은 규장각 검서관으로 재직하며 조선후기 문화발전의 디딤돌로 톡톡한 역할을 했습니다. 서자 출신 학자들은 특히, 사회적 차별을 받고 자란만큼 백성들의 고충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런 점 때문에 정조에게 현실에 맞는 정책을 제시할 수 있었습니다. 정조는 1791년 모든 백성이 자유롭게 장사를 할 수 있는 '신해통공'이란 제도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 전까지는 '금난전권'이라고 해서 특별한 권한을 가진 사람들만이 장사를 할 수 있었지요.
이 모든 열매가 정조의 자주의식과 민본주의로부터 탄생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