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세 따라 배치한 '고택' 오천년 건축예술 정수
역사를 통해 미래를 보는 여정(旅程)  1 호설암(胡雪巖)의 옛집을 찾아서



원림의 집은 밖에서 보면
마치 성곽같이 높은 담벼락이고,
집은 벽과 맞닿아있다.
별도의 대문은 없지만
사람이 기거하는
이층집의 아래층으로 통로가 있어,
집 안으로 들어오면
가장 먼저 보이는 곳이 지원이다.
작은 연못에는 금빛 잉어가
사람 따라 노닐고
괴석과 이름 모를 꽃과 나무들이
곳곳에서 조화를 이루니
선경 같이 보인다.



▲상인 중의 상인, 휘주 상인을 대표하는 호설암


호설암(胡雪巖, 1823~1885)은 휘주 상인을 대표하는 사람으로 이름은 광용(光埇) 자는 설암으로 휘주 적계(績溪)에서 태어났다.

"나는 원래 가난하고 비천한 집안 출신으로 선친께서 타개하신 후부터 호구지책으로 전장(錢莊, 청나라 시대 상업금융기관)에서 도제로 일하고 있었다. 청소와 주인어른의 차를 준비하는 일부터 시작하여 수금을 담당하는 포가의 자리까지 올랐지만 평생 이렇게 살고 싶지는 않았다"고 호설암 스스로 말하고 있다.

호설암에게는 사람을 알아보는 안목과 식견이 있었다. 돈으로 돈을 버는 것보다 사람으로 돈을 버는 것이 훨씬 멋진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배경도 없고 가난했던 선비 왕유령(王有齡)에게 전장에서 손비처리 되었던 거금 오백 냥을 투자한다. 그를 큰 인물로 만들기만 하면 평생을 믿고 의지할 수 있다는 계산이 있었을 것이다. 후일 왕유령이 절강순무대신까지 오르면서 그의 도움으로 전장을 독자적으로 만들 수 있었다. 호설암은 중국식 관시(關係)를 잘 만들어 낸 사람이라 아니할 수 없다.

호설암은 전 생애를 통하여 천부적으로 타고난 근면성과 용인술을 활용하여 돈장사, 쌀장사, 땅장사, 약장사, 군수품장사까지 하면서 조정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면서 부를 쌓아올렸다. 드디어 조정에서 그에게 정이품에 해당하는 벼슬을 내리니 홍정상인(紅頂商人)이 된다. 봉건사회에서는 보기 드문 일인데, 상인이 벼슬을 할 때 부르는 영광된 별칭이다. 호설암이 모략과 중상, 파산에 이르는 경제적 위기 속에서도 미래를 보는 통찰력과 인내심으로 그 고비를 이겨나가는 능력을 사람들은 매우 높이 평가한다.

그래서 춘추시대의 도주공(陶朱公)을 상성(商聖)이라 하고 호설암을 아상성(亞商聖)이라 말하는 사람도 있다. 당시 흠차대신이었던 좌종당(左宗棠, 1812~1936)은 호설암을 "상인 중에 기인으로서 호협의 기질이 있다"고 했으며 사상가이며 대문호인 루쉰(魯迅, 1881~1936)은 "봉건사회의 마지막 위대한 상인"이라는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사람·건축물 가치가 어우러진 호설암의 옛집

상해에 있는 호설암의 옛집은 크지 않지만 하나의 예술 작품이다. 또 하나의 옛집은 항주 서호를 바라보는 곳에 있는데 오랜 세월 돌보는 사람이 없어 폐가로 변해갔다. 문화대혁명 시절에는 너무 참담한 정황이라 차마 볼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중국의 개혁개방 이후 항주시 정부가 1999년 2월부터 2년간 수리하여 옛 모습을 어느 정도 회복하게 되었고, 2001년 1월부터 관광객에게 개방했다.

건축물의 명성은 자고로 건축물 자체의 아름다움과 창의성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어느 건축물은 그 건축물보다 어떤 사람이 살았느냐에 따라 건물의 명성이 생기고, 가치가 높아지기도 한다. 그런데 상해에 있는 호설암의 옛집은 사람과 건물이 모두 한데 어울려 그 가치와 의미를 높이니 더 많은 사람이 찾게 되는 유명한 명소가 되었다.

상해의 옛집은 몇 해 전에 가보았던 항주의 옛집보다 규모는 작지만 높이 솟아 있는 어풍루(御風樓)의 모양은 거의 흡사해 보인다. 옛집을 소개하고 있는 책자에는 "호설암의 고거는 중국 오천년 건축예술의 정수로서 중국건축문화의 깊은 내용을 잘 구현하고 있다. 고거에 들어서면 부자재에 애쓴 마음, 정교하고 아름다운 배치와 함께 깊은 조예를 세심하게 읽어낼 수 있다"고 자랑스럽게 설명하고 있다. 옥(玉)에도 티가 있다고 하는데 호설암의 고택은 흠잡을 곳을 찾기 어려웠다.

원림은 규모가 크기 때문에 보기 좋은 곳, 어울리지 않는 곳, 숨기고 싶은 곳이 섞이게 마련이다.

그래서 그 장소에 어울리지 않는 속경(俗景, 저속한 경물)과 패경(敗景, 좋게 보이지 않는 경물)을 가리거나 배제하는데, 이는 "속되고 흉한 것을 가지고 훌륭한 것을 받아들인다"는 뜻이 된다. 위풍당당한 어풍루가 높이 솟아 있는데 그 밑은 태호석으로 기둥을 세워 공간이 넓다.

그러나 이것은 관심이 없으면 밖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괴목(怪木) 같은 태호석 기둥 사이 공간으로 들어가니 시원하고 안정감이 있는데 위로 오르는 미로가 있다. 지세에 따라 건물을 배치했기 때문에 기교를 부리면서도 본질을 잃지 않는다.

중국 건축의 특징 중 하나인 누창(漏窓)의 조각은 그 솜씨가 비할 데 없이 공이 들어가 있다. 그러나 그 누창의 본질은 조각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다보이는 바깥의 풍경에 있다. 태호석도, 매화도, 대나무도 볼 수 있어 밖의 모습이 창틀을 통해 한 폭의 풍경처럼 아름답게 비출 때 누창의 진정한 가치가 살아난다. 괴석이나 나무, 조각 등이 누창과 시각적으로 연계되어 아름다운 풍광이 창조되는 것이다.

이 집에서 놓칠 수 없는 것은 서호산수의 축소판이며 천하절경을 울타리 안으로 옮겨놓았다고 절찬하는 지원(芝園)이다. 원림의 집은 밖에서 보면 마치 성곽같이 높은 담벼락이고, 집은 벽과 맞닿아있다. 일반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별도의 대문은 없지만 사람이 기거하는 이층집의 아래층으로 통로가 있어, 집 안으로 들어오면 가장 먼저 보이는 곳이 지원이다. 사방으로 둘러싸인 집이 연못을 내려다보게 되어 있다. 작은 연못에는 금빛 잉어가 사람 따라 노닐고 그 위에 곡교(曲橋), 회랑, 정자 등이 있고 괴석과 이름 모를 꽃과 나무들이 곳곳에서 조화를 이루니 선경 같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이 서호는 아니다.

서호는 자연 그대로인데 반해서 이곳 지원은 인공적인 연못에 불과하다. 지원에도 원림의 상징 중 하나인 가산(假山)이 있다. 이것은 본래 호수나 연못 한 가운데 있는 것이 일반적인 통례인데 연못의 면적이 본래 작은 탓이어서 그런지 연못 한쪽 면을 크게 차지하고 있다.

진시황이 함양에 물을 끌어들여 큰 연못을 만들고 그 한가운데 신선이 산다는 봉래산(蓬萊山)을 만들어 복과 장수를 기원했다. 원림에 가산을 만들어 신선이 사는 곳으로 만들고자 하는 기법은 후대에까지 깊게 응용되었다. 한나라 장안성의 건장궁(建章宮), 당나라 장안성의 대명군(大明宮), 그리고 이 근래에는 청나라 이화원, 곤명호에도 가산이 있는 것은 우리가 가보아서 잘 아는 일이다.
따라서 지원의 가산은 한국의 돈 많은 사람의 개인 정원에 돌을 쌓아 그 사

이 나무와 꽃을 심은 듯한 모양이다. 물론 한국 정원의 그것보다는 격(?)이 높지만, 지원에서 세한삼우(歲寒三友)와 연꽃이 보이는 것 또한 인상적이다. 강남 원림에서는 보통 있는 것이지만 말이다.

옛사람들은 유가사상을 매우 중시했고, 식물에도 그 사상을 담고자 했다. 소나무는 늘 푸르고 강직하며 대나무는 곧고 절개가 있었고, 매화는 추운 겨울을 뚫고 꽃을 피웠는데 사람들은 이런 식물의 자태에서 고상하고 순결하며 강인한 정신력과 품격을 연상했다. 또 연꽃은 더러운 흙탕물에 연약한 뿌리를 내리고 있지만 오래 살고, 수면 위에 피어난 꽃은 순결하고 찬란하다. 연꽃의 이런 생태적 특징은 인생의 심오한 철학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더럽고 속된 사회에 살고 있는 인간이 갖춰야 할 고상한 품격과 절개에 비유되기도 한다. 그래서 연꽃은 소나무, 대나무, 매화와 마찬가지로 산수화나 원림에 자주 등장한다.


이 네 가지 식물은 그 자체가 경관이 되었으며 내포하고 있는 인문적 의미로 사람들의 정서를 자극했다. 원명원에 있는 호수에 연꽃이 가득 핀 것을 본 건륭황제는 "앞뒤좌우가 모두 군자로구나"라고 평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또 하나 집 안에는 호설암의 모친이 아침저녁으로 향불을 피웠다는 불당(佛堂)이 있는데 절처럼 보이지 않고 생활의 일부처럼 자연스럽게 녹아있었다.

이 원림의 뒷문에는 상점이 있어 호설암 옛집의 사진집을 판매하고 있었다. 책을 구해 살펴보며 돌아 나오는 데 사람이 사는 집을 이렇게 아름답고 절묘하게 만들 수가 있을까. 호설암의 예술적 감각과 탁견에 감복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