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용택 새얼문화재단 이사장의 중국기행 / 역사의 아픔이 배어 있는 도시  항주와 서호 2
장이모우 감독 '인상서호쇼' 장관 … 군무 눈길

사천성에 뿌리둔 변검 … 탈 많이 바꿀수록 고수


▲변검(變瞼)을 보면서 식사하다
항주 시내에 파국포의풍미주루(巴國布衣風味酒樓)에 있는 파국포의(巴國布衣) 식당에서 저녁을 했다. 건물이름과 식당옥호 치고는 별난 이름이다. 파국이란 파촉(巴蜀)에서 온 것인데 사천성 중경(重慶)지방을 '파'라하고 사천성 성도(成都)지방을 '촉'이라 해서 파촉하면 사천성의 별칭이 된다. 따라서 '파국포의풍미'는 중경지방 서민들이 맛있게 먹는 음식으로 해석하면 된다. 사천요리의 특징은 매운 맛에 있다. 아무래도 땀 흘리면서 식사하겠구나 생각했는데, 음식의 맛도 좋았고 비록 작은 무대였지만 열연하는 변검 공연을 볼 수 있어 횡재한 기분이었다.
변검이란 본래 사천성에 뿌리를 두고 있다. 탈을 쓰고 나온 연기자는 발을 떼지 않고 서서 한 번씩 도리질을 할 때마다 얼굴에 쓰고 있는 탈이 다른 것으로 변하고 다시 한 번 돌리면 또 달라지는 공연이다. 그렇게 해서 얼굴의 탈이 달라지는 횟수가 많을 수록 고수(高手)라고 한다. 무대에 한번 서기 위해서는 최소한 십년의 수련이 필요하다고 하는데, 변검이 요동칠 때마다 손님들은 식사하는 것도 잊고, '와아'하는 환호성을 소리쳐 천정까지 치솟는다. 대체로 검정, 빨강, 흰색을 중심으로 채색된 탈을 보고 경극에서 보는 얼굴과 혼동하기 쉽다. 그러나 변검의 탈은 경극의 분장과는 다르다.
경극에서 볼 수 있는 울긋불긋한 얼굴은 가면이나 탈이 아니고 사람 얼굴 위에 직접 그려 분장하는 것이다. 그것도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특정한 도안 검보(瞼譜)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경극 배우들은 작품을 배울 때는 맡아야 할 역할의 검보에 따라 분장하는 것을 스스로 배워 익혀야 한다. 검보는 각각의 역할이 맡은 개성을 나타낸다. 예를 들어 붉은 얼굴은 충성스럽고 용맹스러우며 정직하고 솔직함을, 검은 얼굴은 호방하고 어리석음을, 푸른 얼굴은 포악하고 오만하며 용맹스러움을, 매우 흰 얼굴은 가슴속에 악의를 품고 있는 것을, 얼굴에 흰색으로 두부크기의 그림모양을 하면 지위가 낮은 사람을 나타낸다.
일일이 예를 들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얼굴색과 그림의 무늬로써 극 중 인물의 개성을 표현하여 관중들이 일목요연하게 알아볼 수 있도록 해준다. 중국인들에게 익숙한 경극의 등장인물 중 조조(曹操, 155~220), 엄숭(嚴崇, 1480~1567) 등은 순백의 얼굴을 하고 있는데, 이는 간사하고 독선을 일삼는 사람이라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반대로 관우(關羽, ?~219)의 붉은 얼굴은 위엄을 의미하며 정이 깊고, 의리를 중시함을 나타낸다. 포증(包拯, 999~1062)의 검은 얼굴과 국자 눈썹은 인정에 구애됨이 없이 공평무사함을 의미한다.
끝으로 변검이나 경극을 교육하는 특징은 말로 전하고 마음으로 가르치는 것으로(口傳心授) 스승과 제자가 일대일로 마주하여 직접 교육하는 것이지 책에서 얻는 경험이 아니라는 것이다. 식당에서 뜻밖에 생각지도 못했던 변검을 본 것은 일거양득이었다.

▲인상서호(印象西湖)쇼
호반위에 펼쳐진 장이모우(張藝謀) 감독의 대담한 기획과 한밤의 환상적인 연출은 사람을 매료시킨다. 호숫가에 계단식 가설 객석을 만들고 바람을 막는 벽도, 지붕도 없다. 또한 넓은 호수 위가 연기자들의 무대가 된다. 무대와 관중석을 에워싸고 있는 천막도 없는 거대한 노천극장 주변은 검은 밤이 감싸 안고 있을 뿐이다.
공연 시간이 되자 큰 북소리와 함께 객석도 무대(호수)도 불이 꺼지고 칠흑 같은 어둠과 정적이 주위를 감싼다. 저 멀리 호수 한가운데 홍등이 드문드문 켜지면서 수면 위에 붉은빛이 비치니 마치 한 폭의 그림 같다. 호수 왼쪽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노 젓는 배를 타고(사실은 소음이 차단된 전기모터를 사용한다) 남자 주인공이 나타난다. 그리고 호수 오른쪽의 이층누각은 아름다운 오색 불빛 속에 비련의 연인을 싣고 호수 한 가운데로 미끄러지듯 떠온다. 이렇게 시작되는 영상(映像)은 그 넓은 무대(호수)에서 관중의 시선을 자연스럽게 한 곳으로 집중시킨다.

간간이 수 백여 명의 연기자들이 호수 전체를 메우며 집단적으로 군무(群舞)를 추는 것도 볼만하다. 엄청난 뭉게구름이 호수 전체를 덮는데 마치 실제처럼 보이게 하는 기술은 사람을 놀라게 하고 감탄하게 만든다. 공연의 주요 내용은 사랑하는 사람들이 만나고 이별하여 애절한 비극으로 끝나는 간단한 줄거리이다. 판자로 만든 무대는 호수의 수면 아래로 살짝 내려가 있어 보이지는 않지만 연기자들은 거의 대부분 장화를 신고 있었다.

너무나 넓고 먼 무대를 스포트라이트로 집중시키고 빛 하나 없는 밤의 적막은 큰 공간을 보완하지만 스케일이 너무 광대해서 어딘가 허전하다. 그러나 호수를 무대로 이용한다는 발상은 얼마나 기발한 착상인가! 장이모우 감독이 원래 장대하고 화려한 것을 좋아하는 것은 알고 있지만 이것은 영화와는 또 다른 창작물이다. 하늘도, 호수도, 그리고 관객까지도 밤의 어둠을 통해 한 가닥 빛으로 만들어 내는 영상 기술은 놀랍기만 하다.

중국 기준으로 보자면 항주의 인구는 칠백만으로 그리 큰 도시가 아닌 데도 이렇게 대형 프로젝트를 몇 개월째 계속 공연하고 있다. 토요일과 일요일 밤에는 하루에 두 번씩 공연을 한다고 하는데, 아무리 상해가 항주와 두 시간 거리에 있다고 하지만 중국경제의 위대함을 새삼스럽게 실감하는 현장이다. 공연 전 고급 승용차 대여섯 대가 몰려 들어왔는데 나중에 들은 소리는 대만의 고위 정치인들이 관람하기 위해서 온 것이었다고 한다. 보기 좋고 듣기 좋은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