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주(徽州)와 삼청산(三淸山) 1
휘주 패방은 양·질 측면서 중국 최고로 꼽혀


하산하는 케이블카 속에서 황산을 내려다보니 우리나라의 금강산이 문득 떠오른다. 한국의 중심 산악이라면 동에는 금강산, 서에는 묘향산, 남에는 지리산, 북에는 백두산, 중앙에는 삼각산이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47권에 보면 다음과 같은 표현이 있다.
"금강산은 첫째 이름이 금강, 둘째 개골(皆骨), 셋째 열반(涅槃), 넷째 풍악(楓嶽), 다섯째 지달(枳)이라고 하는데 무릇 일만 이천 봉의 바위산이 뼈대를 세우며 동쪽은 푸른 바다로 이어지고 있다. 삼나무와 전나무가 하늘을 찌를 듯 높아 바라보면 그림 같은데 내외의 산에는 108사찰이 있고, 그 중 명찰은 표훈(表訓), 정양(正陽), 장안(長安), 마가연(摩訶衍), 보덕굴(普德窟), 유점사(楡岾寺)라고 할 수 있다."
그 뿐만 아니라 금강산 일만 이천 봉 각 봉우리와 골짜기마다 「화엄경」에 등장하는 각종 명칭을 이끌어 이름을 부여하니 금강산은 그 자체가 화엄불국세계(華嚴佛國世界)가 되었다. 그래서 송(宋)·원(元)시대 중국 사람들은 "원컨대 고려국에서 태어나 금강산을 직접 볼 수 있게 하소서(願生高麗國 親見金剛山)"라고 금강산 보기를 내세의 소원으로 삼았다고 한다.
오대산과 낙산사는 중국이나 인도에도 있지만 금강산은 우리 산하에만 있으니 그에 대한 자부심과 신앙심이 어떠했을까! 더욱이 「팔십화엄경(八十華嚴經)」 제보살주처품(諸菩薩住處品)에 나오는 법기보살(法起菩薩)은 오직 금강산에 머물면서 반야(般若, 지혜)에 관한 설법을 한다고 되어 있으니 금강산이 많은 이들에게 존경과 신앙, 애정의 산이 되지 않는다면 도리어 이상한 일일 것이다. 또한 금강산은 천재화가 겸재(謙齋) 정선(鄭敾, 1676-1759)을 통해 새롭게 발견되어 진경산수(眞景山水)라는 조선의 새로운 화풍을 열어 그 아름다움과 가치를 더욱 인정받은 산이기도 하다.
조선왕조의 성리학자들은 음양이 이상적으로 조화된 세계와 땅이 바로 금강산이라 생각했고 반드시 순례할 곳으로 인식했다. 그래서 많은 학자와 문인들이 기행문과 함께 명문을 남기고 있는데, 만일 서하객도 우리와 함께 금강산에 올랐다면 탄성으로 가는 걸음을 멈추었으리라. 비할 데 없는 기이한 풍광과 동해로 뻗은 산골짜기 위로 피어오르는 운무, 학자와 예술인들이 쏟아낸 글과 시, 문장들이 묻어있지 않은 곳이 없다. 금강산은 자연과 인간이 빚어낸 최고의 예술이다.
서하객, 당신이 꿈에서라도 금강산을 보게 된다면 내가 미처 깨닫지 못한 금강의 절묘한 경관을 일깨워주기 바란다.

▲휘주 - 효와 충절을 자랑하는 패방군
황산의 풍광에서 깨어나 보니 버스는 어느새 휘주(徽州)를 향해 달린다. 중국지리서를 살펴보면 안휘성(安徽省) 남부 황산 기슭과 신안강(新安江) 주변에는 찬란한 문화와 오래된 역사가 온전히 보전된 지역이 있는데 이곳이 바로 '휘주'라고 말하고 있다. 휘주라는 명칭은 원나라 때부터 사용하기 시작하였으나 오늘날의 휘주는 행정단위가 아니라 하나의 문화권을 의미한다. '휘주문화권'을 살펴보면 안휘성의 흡현(縣), 휴녕(休寧), 기문(祁門), 적계(績溪), 이현(縣)과 강서성(江西省)의 무원(源) 등 여섯 고을이 포함되어 있다.
북에는 황산이 남으로는 삼청산(三淸山)이 있는데, 그 사이에 자리한 육촌(六村)은 휘주 상인들이 축적한 부(富)를 바탕으로 교육에 치중했고, 아름다운 건축물은 수세대를 거치도록 변함없이 지켜져 왔다. 휘주의 수려함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명나라의 극작가이며 문학가인 탕현조(湯顯祖, 1550-1616)는 "꿈에서라도 휘주에 가보지 않은 것은 일생에 가장 안타까운 일이다(一生癡絶處 無夢到徽州)."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휘주의 자랑거리 중 하나는 패방이다. 넓은 평원을 일곱 패방이 가로질러 간격을 두고 늘어서 있는 흡현의 당월패방군(棠牌坊群)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그 모습이 장관이다. 원래 패방이란 문(門)의 역할을 하거나 마을 입구 표시를 하는 등 공간을 분리하는 다양한 기능을 하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패방은 군왕과 그 지역 가문간의 예를 상징하는 것으로 근방 지역 사람들에게 효와 충절을 내세워 마음속으로 순종을 서약하도록 하고, 다른 한 편으론 패방이 세워진 가문의 권위를 높이는 역할을 했다. 휘주의 패방은 숫자와 질적인 측면에서 중국 전역에서도 최고로 손꼽히는데 흡현만 하더라도 94개의 패방이 있으며 그 중 정절(貞節)을 기려 세워진 패방이 34개나 된다고 한다.
이 지역에서 발간된 「방림집(坊林集)」 첫 장에는 '자효천하무쌍리(慈孝天下無雙里)'라며 자기 고장을 자랑하는데, '효에 관한 한 하늘 아래 자기 동네와 견줄 만한 곳이 없다'는 뜻이다. 집권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보다 더 흐뭇한 일은 아마 없을 것이다. 효는 군왕에 대한 충성의 기본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이든 너무 과하면 병폐를 낳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강남의 한 현의 지방사(地方史)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정절을 지켜 칭송받은 여성은 송나라 때 4명, 명나라 때 95명, 청나라 중기 무렵에 이르면 무려 203명에 이른다.
부녀자가 정절을 지키는 일은 물론 칭송받을 만하지만 이토록 많은 이들이 그와 같은 패방을 하사받을 정도라면 패방의 의미가 없다. 상황이 이렇게 된 것은 그 지역의 실력자들이 여성 개인의 사정에 아랑곳없이 문중과 공동체의 권위와 체면을 내세우기 위해 서로 경쟁하면서 빚어진 일이다. 여성들만 도덕이라는 이름 아래 옭아매는 생활이 심화되었기 때문에 한국의 열녀문과 중국의 패방이 서로 다를 것이 없었다. 1827년 정부는 한 사람의 패방이 아니라 여러 사람을 함께 기리는 패방만을 허락했고, 1843년에는 자살이라는 극한상황에 이른 여성들만 패방을 세울 수 있다고 포고하기도 했다.
예로부터 휘주에는 목조(木雕), 전조(塼雕), 석조(石雕)라는 삼조(三雕) 기예가 뛰어나다고 전해져 왔다. 살펴보니 돌로 된 패방에는 감히 넘볼 수 없는 기교를 새겨 넣어 아름답고 웅장해 보인다. 가묘(家廟)나 서원의 건축물은 이 지역의 특산물인 삼나무로 되어 있다. 중국 전통 건축에서 칸막이 역할을 하는 나무 벽의 윗부분은 창살로 되어 있는 청의당(淸懿堂) 격선(隔扇)에 보이는 조각들은 웅장하면서도 섬세함이 돋보여 신묘하게 보인다.
창틀에 여러 가지 조각 장식을 하여 바람이 잘 통하게 되어 있는 누창(漏窓)은 소주 원림의 것과 비교하여도 더욱 아름답다. 이곳의 건축물이 오래 보전될 수 있었던 까닭은 옻칠을 하지 않고 흡수력이 좋은 오동나무 기름(桐油)을 발랐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처럼 고급 목재를 사용한 까닭은 나무의 자연스러운 결을 살리기 위해서인데, 채색을 거의 하지 않은 건물 내부가 조용하면서도 장중한 느낌이 드는 이유 역시 오랜 세월을 견디며 변치 않은 나무의 투박한 본색 때문이리라.
「방림집」을 살펴보니 이 지역은 본래 포(鮑)씨 문중의 집성촌이다. 지역의 이름을 따서 '당월 포씨'라고도 하는데 여러 패방, 가묘 및 서원의 건축물들이 모두 포씨 가문의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는 관중(管仲)과 포숙(鮑叔)의 지극한 우정을 관포지교(管鮑之交)라 하여 신의(信義)와 우정의 표본으로 삼는데, 포씨 문중의 족보에는 바로 자신들이 제나라 포숙의 후손이라고 하여 자랑스럽게 내세우고 있다. 포씨 문중이 이곳에서 크게 번성하게 된 시초는 포안국(鮑安國)이 이 지역 태수로 있으면서 수나라의 폭정에서 벗어나 당(唐)나라를 세우는 이연(李淵)과 이세민(李世民)을 도와 크게 공을 쌓은 것이 원인이 된다. 세상이 평정된 후에 이연은 포안국에게 육주총관부사마(六州總官府司馬)라는 큰 벼슬을 주어 휘주 일대를 관할하는 권한을 주었다. 아마도 당연히 죽었어야 할 친구 관중을 살려내 나라를 운영하게 하고 자신은 그 밑에서 보필한 포숙의 큰 덕이 당월 포씨 문중까지 미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