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용택 새얼문화재단 이사장의 중국기행 / 황산(黃山)과 서하객(徐霞客) 1
운하 따라 양옆으로 길 내어

뱃길 건너 사람과 담소 나눠


양편 가도에 명인 저택 눈길

옛 인물 떠올리며 발길 멈춰



역사기행을 떠나기 전날 밤엔 언제나 흥분과 설렘으로 잠을 설치곤 한다. 나이도 들만큼 들어서 침착해야 하는데 얼굴은 평온하지만 마음은 여전하다. 습관과 버릇이 이렇게 길고 질긴 것이라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했던가. 5박6일의 비교적 짧은 일정이지만 오고가는 시간을 살리기 위해 상해가는 첫 비행기(오전 8시45분발)에 일행이 올랐다.
 
상해 푸동(浦東)공항에 도착하니 기내에 검역관이 올라와 승객 머리에 체온감지기를 대고 '신종플루(독감)' 감염 여부를 면밀히 조사했다. 조사가 끝난 후에야 비로소 비행기에서 내릴 수 있었다. 검증이 끝난 사람들은 먼저 순서대로 공항으로 들어가면 될 터인데 모두 함께 움직여야 해서 짧은 시간이지만 비행기 안에 갇혀 있는 것이 답답했다.

▲동리진(同里鎭)과 사가원림(私家園林)
우리는 보통 강소성 성도 소주(蘇州)를 수향(水鄕)이라 하면서 졸정원(拙政園)을 비롯한 원림(園林)을 찾는다. 그 규모와 아름다움에 취하기도 한다. 그러나 수향의 본모습인 운하와 다리를 보고자 한다면 동리진과 주장진(周莊鎭)을 찾아야 한다.
동리진은 강소성 오강(吳江)현에 있는 강남의 작은 마을이다. 수로가 혈맥처럼 이어진 운하는 영국인이 철선을 앞세워 상해를 침공하기 전까지는 물류의 중심이었다. 역사적으로 춘추(春秋)시대 십이열국(十二列國)의 하나인 오(吳)나라의 중심이기도 했다. 700여년의 역사를 쌓아 춘추오패(春秋五覇)의 하나로 세력이 강대했으나 부차(夫差)의 오만함으로 인해 월왕 구천(句踐)에게 B.C 373년에 망한다.
소주와 주장은 좁은 물길을 따라 좌우로 집을 지어 한 번 외출이라도 하려면 집을 나와 대문에 매어둔 작은 배를 타고 가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동리는 운하를 따라 양 옆으로 길을 내어 사람들이 통행하고 길을 따라 건물이 들어서 있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이 뱃길 건너 사람과 이야기가 되고 지나가는 사람과도 몸을 스치게 된다. 나그네가 좀 멀리서 보는 느낌은 어머니가 계신 포근한 시골 마을처럼 보인다. 그래서 형제와 친척과도 이웃으로 엉켜 살아 말도, 흉도, 잔일도, 웃음도 많아 이야기가 끊이지 않는 분위기다.
일행 중 한 사람은 이곳의 작은 폐가 한 채를 구입해서 살고 싶다고 했는데 아마도 건조한 도시 아파트 생활에서 오는 소외감의 반증이 아닐까? 언제라도 누가 오면 한 동네 가족이 될 듯한 정서가 동네 골목 그리고 소박한 사람들의 얼굴에 감돈다. 이곳은 다리가 어느 곳 보다 많다. 그중 동리삼교(同里三橋)는 작고 귀엽고 나름대로의 운치가 있다. 태평교(太平橋), 길리교(吉利橋), 장경교(長慶橋)는 물길이 교차하는 곳에 있는데 다리마다 화강암으로 된 기둥에는 격식을 갖추어 대련이 새겨져 있다.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예전에는 혼인날 꽃가마 악대가 연주를 하며 이 세 다리를 돌고 돌아 행운을 빌면 복이 온다고 믿었다. 다리 이름이 다 길상을 뜻하기 때문에 그럴 만도 하다. 또 나이 많은 노인이 자기 생일날 동리삼교를 한 바퀴 돌면 저승의 한 관문을 넘어 극락세계로 더 가까이 간다고 했다. 이 작은 지역 주민들은 자신들이 스스로 만든 건축물에 전설과 풍속을 덧붙여 그것을 세월과 함께 믿고 따른다. 그래서 또 하나의 세상을 창조해 내는 공동체의 내실이 있어 보인다.
크고 작은 명인들의 저택이 운하 양편 가도 쪽에 드문드문 들어 서있다. 작은 것은 겨우 30평 정도이지만 큰 것은 원림이다. 건물의 크기에 관계없이 집 앞에는 누구의 고택이라고 표시를 해서 옛 인물들을 한 번쯤 생각하고 걸음을 멈추게 한다. 경락당(耕樂堂)은 비교적 오랜 역사를 가진 곳이다. 명나라 때 건축되고 청나라 때 개축한 건물이다. 소주의 어느 원림에 비해 손색이 없다. 건물과 정원, 태호석 등 전체적인 구조에서 장인의 독특한 개성이 돋보이며 매우 정교한 건축물이다.
최초의 주인은 명대(明代)의 주상(朱詳)인데 이는 이 고장 사람으로서 유명한 소주의 보대교(寶帶橋)를 건설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주상은 공으로 관직에 오르는 대신에 이곳에 눌러 살게 해달라고 간청했다고 한다. 경락당을 관람한 사람들은 과연 주상의 선택이 탁월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경락은 주상의 아호인데 그 아호에서 풍기는 정서는 그 사람의 생활과 일치하는 것 같다.
생각지도 않게 혁명가, 시인 그리고 학자인 진거병(陣去病, 1879-1933) 고택도 보인다. 진거병은 소년시절에 발분하여 책을 읽을 때 한무제 때의 곽거병(去病)을 존경하였는데 특히 그가 남긴 말 "匈奴未滅, 何以家爲"에서 크게 감명 받아 자신의 이름 경림(慶林)을 거병(去病)으로 개명했다. "흉노를 정복하지 않고서야 어찌 공경(公卿)이라 할 수 있느냐!" 곽거병이 기병 5만여를 이끌고 흉노를 쳐서 고비사막 북쪽으로 쫓아낸 공으로 나이 20대 초에 대사마(大司馬)에 오른 그 기백에 어린 진경림은 감동했으리라. 그러나 성장한 진거병은 기울어져가는 청나라의 국운을 되살리기 위해서는 부패와 외세, 매판자본 등이 병(病)으로 보였을 것이고 그것을 다 쓰러뜨리고(去) 싶었을 것이다. 손문선생과는 선친 때부터 대를 이어 가까운 사이고, 자신도 강유위(康有爲, 1858-1927), 양계초(梁啓超, 1873-1929)의 유신사상(維新思想)에 경도되었으며 계속해서 교수생활을 하면서 혁명동지들과 함께 문학과 학문연구로 전 생애를 일관했다. 이 경우에는 원림에 비해 초라한 건물일지라도 그 속에 살았던 인물의 삶이 원림보다 건물을 돋보이게 만든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