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위구르족 독립운동
중국 신장 위구르족의 독립운동은 계속되고 있다.

지난 여름 전세계를 뜨겁게 달구었던 베이징 올림픽에 모든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됐을 때 중국 신장성에서는 독립을 요구하는 위구르족의 폭탄 테러가 잇따라 발생했다.

단순 테러뿐만 아니라 정부정책에 대한 반대운동 또한 주요 도시에서 벌어졌다.

지난 7~8월 인천일보 실크로드 취재팀이 방문한 쿠차와 카슈가르(이하 카스)는 무차별적인 검문검색이 이뤄졌다. 특히 위구르족에 대한 검문은 상상을 뛰어넘었다.

취재팀은 신장성의 수도인 우루무치 공항에 도착하면서부터 이 같은 차별적인 검문을 쉽게 볼수 있었다. 위구르족 가족이 공항검색대 앞에서 어쩔줄 몰라하는 광경을 목격한 것이다. 결국 검문대 옆 특별 조사실에서 한시간 넘는 검색을 받은 후에야 이들 가족들은 공항을 빠져나올수 있었다. 어린아이를 안고 있던 한 여인은 공항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가족들을 만나자마자 울음을 터뜨리기까지 했다.

이 같은 모습은 신장성 곳곳에서 벌어졌다. 특히 신장성을 벗어나는 위구르족에 대해서는 가혹하다시피 한 검문이 이뤄졌다.

8월10일 쿠차에서 머물던 취재팀 호텔 인근에서 새벽에 수십건의 연쇄 폭탄테러가 발생했다. 아침 일찍 급히 쿠차를 떠나려고 했지만 도시를 봉쇄한 중국 공안의 검문을 수차례 받아야 했다. 자동화기를 겨냥한채 모든 차량을 검문하는 이들 앞에서 사진기를 꺼내기 조차 두려움을 느낄수 밖에 없었다. 흥문한 공안을 뒤로하고 쿠차를 떠나 타클라마칸 사막을 가로지르는 고속도로에 들어섰지만 이내 가는길을 포기해야 했다.

중국 당국이 사막 고속도로를 봉쇄한 것이다. 수천대의 차량이 사막위에서 줄지어 늘어섰다.

오후들어 봉쇄가 일부 해제된 틈을 타 취재팀은 호탄을 거쳐 카슈가르까지 갈 수 있었다. 물론 하루 수십번의 검문을 겨우 통과하면서 말이다. 중간에 인민해방군의 검문을 직접 받기도 했다. 한마디로 게엄상태인 것이다.
 
 하지만 취재팀이 도착한 카스의 풍경은 적막함을 넘어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이미 두차례 테러가 발생한 이후라 도시 곳곳에 방공호와 차단벽, 검문소로 가득했다. 주요 관공서는 테러에 대비해 바리케이트와 차량돌진에 대비한 방어시설들이 가로막고 있었다. 취재팀이 묵던 호텔까지 중국 공안들이 따라다니며 감시하는 모습까지 연출했다.

테러뿐 아니다.

취재팀이 도착한 카스 시내에서는 한창 도로공사가 진행중이었다. 하지만 현지 위구르족 가이드에 따르면 도로공사가 지난겨울 시작했어야 했지만 위구르족 대부분이 이를 반대하며 집단봉기에 나서는 바람에 공사가 반년 넘게 중지됐다는 것이다.

신장성은 중국 안에서도 치안상태가 가장 좋지 않은 곳으로 유명하다. 위구르족의 독립운동이 하루이틀이 아닌 수백년 동안 이어져 오면서 잦은 마찰과 봉기, 테러가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2~3년에 한번씩 이 곳에서는 폭탄테러가 발생하고 있다고 현지인들은 전하고 있다. 대부분 언론에서 다루지 않아 외부세상에는 알려지지 않고 있을 뿐이다.

최근 들어서는 신장성 곳곳에서 천연가스와 석유자원이 발견되면서 이를 계기로 한 독립운동이 더욱 확산되고 있는 추세다. 이와 함께 이들을 감시하고 탄압하는 중국 정부의 자세도 더욱 강경해 지고 있다.

위구르족은 중국으로 편입된지 반세기가 넘었지만 여전히 그들만의 생활을 고집하고 있다. 신장 인구의 거의 절반인 900만명의 위구르족은 지금까지 한족과 전혀 동화하지 않은채 살고 있다. 이들이 이용하는 가게도 따로 있어 위구르족이 운영하는 가게만 이용한다.

실제 한족이 많이 사는 우루무치의 경우 가게 간판에 중국어가 더 크게 표시돼 있지만 위구르족이 몰려있는 쿠차나 카스의 경우 위구르어가 간판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또한 이들은 다른 소수민족과도 전혀 교류를 하지 않고 있다. 식당과 가게, 결혼식 등 모든 생활자체가 상당히 배타적인 것이다.

이 같은 배타적인 문화가 위구르족을 지금까지 지켜올 수 있었다고 현지인들은 설명한다. 다른 소수민족이 대부분 중국 한족에 동화돼 살고 있지만 위구르족만큼은 자신의 언어와 종교, 문화를 지킨 덕분에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중국 정부도 이들을 동화시키기 위한 수많은 유화정책을 펼치고 있다. 인구조절을 위해 한명을 낳는 정책을 펴고 있지만 소수민족은 여기서 예외다. 특히 신장성 주요 도시마다 있는 인민광장에는 인민군과 위루르족의 친밀감을 표현한 조각상과 기념탑을 설치해 놓고 있다. 이에 반발한 위구르 민족은 인민광장을 이용하지 않는다. 이들은 여전히 중국과는 다른 삶을 살고 있으며 상당기간 이 같은 추세는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위구르족을 상징하는 모자.
역사적으로 신장은 고대 실크로드의 중심지로 동서 교역의 핵심이었다. 8세기에 들어서면서 이슬람교의 영향을 받았고 이후 중국은 물론 티벳, 몽골, 아랍 등 주변 강대국의 통치를 받아왔다. 18세기 중엽에는 청나라의 직접적인 통치를 거부하고 수십차례의 투쟁을 벌여 동투르키스탄 왕국을 건국하기도 했다. 이후 1877년 신장은 다시 청에 복속됐지만 20세기 초 청이 무너지고 국공내전, 중일전쟁 등 혼란한 틈을 타 위구르인은 1933∼34년과 1943∼49년에 다시 동투르키스탄공화국을 세웠다.

1949년 10월 12일 왕전 장군이 이끄는 중국 인민해방군 제1야전군 제1병단 8만9천 명은 신장으로 진군, 위구르 독립국가를 다시 붕괴시켰다.

1954년 제정한 중국 헌법을 통해 소수민족에 대한 강력한 통치를 정당화했고, 한족을 변방의 소수민족 지역으로 대거 이동시키는 정책을 시행했다. 중국정부는 신장을 개발하고 건설한다는 명목으로 한족을 대상으로 신장으로 하방 캠페인을 벌였다. 1954년부터 집중적인 캠페인을 통해 다수의 한족을 이주시켰는데, 1959년에는 51만여 명에 달했다.

한족 통치에 대항하는 위구르 독립운동은 1950년대 말부터 '동투르키스탄'을 기치로 내걸고 활동을 시작했다. 1962년 옛 소련으로 탈출한 20만 명의 위구르인은 1963년 동투르키스탄 해방군을 조직하여 간헐적인 투쟁을 벌여왔다.

1990년 바런향 대규모투쟁에서는 동투르키스탄 이슬람당이 "성전(지하드)을 일으켜 중국인을 동투르키스탄으로부터 몰아내자"고 외치며 시위를 주도했다. 1992년 12월 30여 개 국가에서 온 해외 망명 위구르인들은 터키 이스탄불에 모여 '동투르키스탄 민족대표대회'를 개최, 동투르키스탄국 국명·국가·국기 등을 결정했다.

1999년 18개국에 흩어진 위구르 독립세력들은 무력으로 독립국가를 건국하는 노선을 재확인하고 군사훈련을 받은 조직원을 중국 내에 잠입시켜 테러를 일으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