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예술이 숨쉬는 안양삼성산
어디 1~2시간 나들이 코스가 없을까? 안양 석수동에 자리잡은 삼성산은 어떨까? 화창한 날씨면 더 좋겠지만 비가 오면 비가 오는대로, 눈이 오면 눈이 오는대로 훌쩍 떠날 수 있는 곳이다.
암봉이 많은 산이지만 깊은 산중에서나 마주칠 수 있는 천년고찰이 주는 평정심을 찾게 해주고, 알듯 말듯한 공공예술의 메시지가 주는 예술의 향기를 느낄 수 있다. 숨가쁘게 달려온 바쁜 일상을 잠시나마 내려 놓을 수 있는 산이다.
삼성산은 높이가 481m로 산행이 어렵지 않다. 계곡 곳곳 바위길과 나무 숲을 지나 정상에 오르면 암봉과 숲속 능선들이 장관을 연출한다. 산 건너 저만치 있는 안양 등 도회지의 모습은 막혔던 가슴을 뚫어 주고, 지나온 삶의 궤적을 반추해 보게 한다.
삼성산 산자락에 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로 유원지에서 예술공원으로 탈바꿈한 안양예술공원 안에는 인공폭포와 야외무대, 전시관을 비롯해 국내외 작가의 예술작품 54점이 설치되어 있다.
산속에는 계곡과 능선의 수려한 산세를 배경으로 들어선 삼막사를 비롯해 염불암, 망월암, 안양사, 삼성사 등의 사찰이 있다.
삼성산에 있는 전통사찰 삼막사(전통사찰 제9호)는 1천300여년전 신라시대에 원효대사가 창건한 후, 조선 초기에 무학대사가 중수했고, 서산대사 등이 수도한 곳으로 전해져 온다.
삼막사는 조선시대에 서울 근교의 4대 명찰 가운데 하나였으며, 특히 서울 남쪽 지역에서 가장 이름난 수찰(首刹)이기도 하였다.
삼막사의 창건은 677년에 이루어졌다. 신라의 원효(元曉)·의상(義湘) 두 고승과 윤필거사(潤筆居士, 또는 尹弼이라고도 함) 등 세 분이 이곳에 초막을 짓고 수행처를 마련한 것이 창건의 시초라는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은 1910년 설암(雪庵; 隱庵妙)이 작성한 '삼성산삼막사사적'에 기록되어 있다.
고려 말 지공(指空)·나옹(懶翁)·무학(無學) 세 스님이 삼막사를 창건하였으며, 이 세 분의 상(像)이 사찰에 봉안되어 있었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여하튼 이 지역 일대의 여타 사찰에서도 원효·의상·윤필거사, 또는 지공·나옹·무학 등 세 분의 성현과 얽힌 설화가 널리 전승되고 있다는 사실은 삼성산(三聖山)이라는 지리적배경이 관계된 것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경상남도 양산(梁山) 일대의 삼성산을 비롯하여 전국 각지에는 이와 유사한 형태의 전승 설화가 상당수 분포되어 있다.
삼막사에는 조선후기 건축양식인 망해루와 명왕전, 고려시대 삼층석탑, 사적비, 삼막사 남녀근석, 마애삼존불, 삼귀자, 감로정 등 많은 지정·비지정 문화재가 있어 삼막사의 오랜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삼막사 성무 주지 스님은 "삼성산이 수도권 서남부 지역 주민들의 휴식처로 사랑받고 있다"며 "종교를 떠나서 산에서 사람냄새가 나도록 등산객들을 배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안양=이동화기자 blog.itimes.co.kr/itimes21



● 찾아가는 길
삼성산으로 가는 길은 많다. 승용차 길로 인천 등 수도권 서남부 지역 사람들은 제2경인고속도로를 많이 이용한다. 이 도로는 서울외곽순환 및 서울~안산간 고속도로와 연계되어 있다.
인천 중구~안양을 연결하는 길이 27㎞의 제2경인고속도로를 타고 안양 석수동까지 20분이면 도착한다. 이 고속도로 종점을 빠져 나오자마자 삼성산 끝 자락에 있는 경인교대 안양캠퍼스가 나온다. 경인교대 입구 초소를 지나 5분여쯤 달리면 주차장이다.
이곳 주차장에서 삼막사까지 이어지는 콘크리트 포장 길이 있지만 차량은 통제 된다.
하지만 일반 등산객들은 주차장에 차를 세워놓고 소나무 숲 등으로 우거진 삼성산 계곡길을 따라 개울을 건너 30여분 쯤 올라 가면 천년 고찰 삼막사가 나온다.



● 삼막사 문화재

▲명부전(문화재 자료 제60호)
명부전은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명부의 10대왕을 모신 곳이며 인간사후의 선악을 심판하는 곳으로 명왕전이라고도 한다.
맞배지붕에 주심포형식으로 정면 3칸 측면 1칸의 내부는 우물 정자형의 천장을 설치한 삼막사 명부전은 조선 고종 17년(1880년)에 건립됐고, 1975년 크게 보수했다.

▲마애삼존불(경기도 유형 문화재 제94호)
산등성이에 있는 암벽에 높이 약 200cm, 넓이 약 250cm, 깊이 약 13cm에 부조한 치성광삼존불로 조선후기를 대표할 만한 걸작으로 손꼽힌다.
이 삼존불은 얼굴이나 상체 부분은 생동감이 넘쳐 조선 불상에서는 파격적 수법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몸의 표현이 평판적이고, 경직된 신체와 하부로 내려갈수록 얕은 기법 등이 조선 후기 불상의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불상 아래 '건륭28년'이라는 문자가 있어 조선후기 불교 조각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으며, 칠성신앙과 다산신앙이 결합한 불교와 민간신앙의 결합상태를 매우 사실적으로 보여주는 자료다.

▲3층석탑(경기도 유형 문화재 제112호)
탑은 주로 금당앞에 세워지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삼막사 삼층석탑은 경내 육관음전 옆 우측의 축대 자연석 위에 세워져 있다.
이 탑은 고려 고종 19년(1232년) 삼막사의 승도인 김윤후가 몽고군 살리타이를 살해하고 싸움에 이긴 것을 축하하기 위해 세운 승전탑으로 높이는 255cm다.

▲사적비(경기도 유형 문화재 제125호)
이 사적비는 비석의 밑받침돌이 거의 땅에 묻혀 있어 비신만 드러나 있는데 별다른 꾸밈이 없는 장방형 비석이다. 비문은 심하게 닳아 있으나 비석의 위치가 경기도 관악산맥의 삼성산 삼막사이고 '강희 46년 숙종 33년(1707) 정해'라는 건립연대가 기록되어 있다.

▲삼귀자(비지정 유형 문화재)
조선후기 종두법을 실시한 지석영의 형 지운영(1852~1935)이 이 곳 백련암지에 은거할 당시에 쓴 글로 바위면을 다듬어 음각으로 거북귀자를 새겨 놓았다.
삼귀자 좌측엔 '불기 2947년 경신중양 불제자 지운영 경서'란 명문이 있는데, 1920년에 쓴 것이며 서체는 전서로 우측에는 '관음몽수장수영자'라 하여 꿈에 관음보살을 본 후에 글씨를 썼음을 알 수가 있다.

▲남녀근석(민속 자료 제3호)
삼막사 뒤편의 칠성각 옆에 있는 2개의 자연암석이다. 그 모양이 남·녀의 생식기 모습을 닮았다고 해 남녀근석이라 부른다.
신라 문무왕 17년(677년) 원효대사가 삼막사를 창건하기 전부터 이 바위는 토속신앙의 대상으로 숭배되어 왔다. 이 바위를 만지면서 자식두기를 기원하고, 일가의 번영, 무병, 장수를 빌면 효험이 있다고 전한다. 4월 초파일과 칠월 칠석날에는 많은 사람들이 촛불과 삼색과일을 차려놓고 제사를 지낸다.
 
 
인터뷰/ 삼막사 성무 주지스님
 
즐겁게 쉬다 가시라고 무료 공양
 
"종교는 빛과 같은 존재다. 어두운 곳을 비춰야 한다. 삼막사는 이런 면에서 이 지역 주민들에게 일정한 역할을 하고자 한다."

2년전부터 이곳 삼막사 주지 스님으로 일하고 있는 성무 스님은 "목탁소리와 불경소리가 아닌 명상음악을 들려주고 등산로와 사찰 내에 시화 패널을 설치해 산을 찾는 사람들 맘에 와 닿는 글과 그림을 전시하고 있다"면서 "일요일에는 2천여 그릇의 무료 점심 공양을 제공한다"고 말했다.

이 처럼 삼막사 풍경이 변한 것은 일상의 삶을 벗어나 즐거운 산행길에 나선 사람들을 위한 조그만 배려에서 시작됐다.

"2년 동안 술먹고 고성방가나 싸운 사람을 본 적이 없다. 그 만큼 산을 찾은 사람은 정신적으로 건강하다는 것을 말해준다"며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 모임' 동호회에서는 쓰레기를 모아 되가져가는 모습을 보았다"고 말했다. 산을 아끼는 사람에게 쓰레기는 자기 몸에 못질하는 느낌 때문이라는 것.

"불교는 '자기 주인공'을 찾는 것이다. 말이 아니라 실천과 수행이 중요하다. 정해진 목표를 달성, 모든 욕망이 소멸될 때 윤회의 사슬에서 벗어 날 수 있다."

그러나 현대인이 마음에 여유가 없이 조급한 것은 '버리고 놓는 것'을 할 줄 모르기 때문이란다. "목표를 달성하고도 또다른 목표를 설정하는 반복된 모순을 떨쳐내야만 의미있는 주체적인 삶을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안양=이동화기자(블로그)itimes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