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약대이 병원과 성공회 한옥성당
AD.175년경 영국에는 성공회라고 하는 교회가 틀을 갖추기 이전부터, 가톨릭과는 또 다른 켈틱 교회라고 불리우는 독립적이고 민족적인 종교가 있었다고 한다.

"여러분, 제국최강의 베쓰뽈 팀, 황성 YMCA 베쓰뽈 팀 선수들을 열렬히 환영해 주기 바라오. 종로거리에는 황성 YMCA 베쓰뽈 단원 모집이라는 벽보가 나붙는다."

영화 YMCA야구단의 한 장면이다. 근대사의 인천에서는 또 다른 영화의 한 장면이 있었다. 
 
 
▲사적 제424호 강화 관청리 성공회 한옥 성당.
약대이 병원과 성공회 한옥성당


제물포항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내동 산등성이, 당시로는 최신식 붉은 벽돌집에서 미국인 선교의사 남득시(南得時·랜디스)라는 벽안(碧眼)의 주인공이 조선민중들에게 사랑의 인술을 펼치려는 마음으로 연출한 '온돌 입원방'과 '가마 앰블런스'가 등장하는 '약선시직원(藥善施直院)'이 그것이었다.

김영일 신부와 인천유형문화재 51호 성공
회 내동 성당. 1891년 준공 후 6 25로 소실되나
1956년 재건되고 있다.
약선시직원이란 성공회가 운영하는 성 루가 병원이 '조선사람들'에게는 별의미가 없다고 느낀, 약대인(藥大人)이란 별명으로 불렸던 20대 나이의 랜디스 선교의사에 의해 다시 재해석되어 붙혀진 이름인데 선행을 베풀면서 기쁨을 주는 병원이란다.

한국식 이름 고요한으로 불리운 찰스 존 코프(Charles John Corfe)는 영국해군의 종군사제출신으로 영국성공회에서 조선지역 주교로 임명하여 선교를 위해 파송한 인물이다.

조선 성공회 초기역사에서 코프 신부의 행적은 여러 곳에서 보인다.

강화에서는 영국해군들이 조선수군을 훈련시키는 일에 기여하고, 서울에서는 현재 성공회성당 자리에서 첫 크리스마스 예배를 보게 되는데, 이날이 대한성공회의 창립일이 된다.

그는 조선민중을 존중하였으며, 이미 탁월한 미적 감각을 가지고 미래를 내다보면서 종교건축문화재를 만들어내고 있는데, 인천에서는 한옥 처마를 그대로 살린 석조 건축물의 내동 성당에 초석을 놓고 있고 아름다운 한옥구조로 된 강화 성공회 성당은 백두산까지 가서 재목을 구해와 직접 짓고 있었다.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에 있는 성공회 성당을 찾았을 때 흥미로웠던 점은 전통 한옥의 형식을 따른 합각지붕 아래 '천주성전天主聖殿'이라 쓰여진 편액이 있었고, 기와를 얻은 지붕에는 십자가가 올라가 있었으며 기둥에는 '삼위일체천주만유지진원(三位一體天主萬有之眞原)' 등 전통사찰과 내용은 다르지만, 한국사찰형식과 동일한 주련이 걸려있어서 특이하면서도 친숙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동인천 내동 성당에 불쑥 찾아가서 만난, 김영일 주임신부는 인천의 문화재로 지정된 성공회 성당만을 두루 재직한 특별한 이력을 가지고 있었다.

문화재 자료 제15호 강화 온수리 성당.
그는 국악(國樂)과 우리 것에 대한 관심이 아주 많아서 성당 구석구석을 안내하며 재미있게 설명을 해주었는데 해박한 지식에 놀라고 날카로운 시각으로 바라보는 문화재관리와 원형복원에 대한 역사적인 의식이 살아 있었다.

그의 설명에 의하면 남득시(랜디스) 의사는 32세의 젊은 나이에 인천에서 요절했지만 한국사람이 미국에서 환생해 온 것 같이 한국문화에 대한 관심이 많았고, 한국어에도 능통하였으며 가례(家禮), 동화, 한국의 귀신, 한의학, 동학사상, 속담연구와 불경 등의 서책을 수집하고 집필한 서적이 모두 300여 권이나 되었으며 이는 연세대학교 도서관에 기증되어 '랜디스 문고'로 보존 되어 있다고 했다.

최초로 고아원을 만들어서 우리가 돌보지 못했던 부랑아들을 거두는 선행에 앞장서서 종교가 가진 사회복지의 효시를 보이고 있으며 혼신을 다하는 그의 치료의술을 받으러 인천을 비롯한 충청, 전라, 황해도 등지에서 뱃길을 따라 찾아온 외래환자는 1892년에 3천594명 1894년에는 4천464명에 이르고 있었다.

이역만리 이국땅 인천에서 가족과 생이별을 한 채, 과로와 외로움 속에서 세상을 떠날 때도, 한복에 두루마기를 입고 청학동 외국인 묘지에 묻혔다고 하니 외세 앞에 한없이 흔들리기만 하던 조선민중과 함께한 숭고한 그의 정신이 영롱한 별빛이 되어 인천하늘을 아름답게 비추고 있는 것만 같았다.

김영일 내동 성당 신부는 일전에 청학동에 누워 있는 남득시 의사의 묘역을 둘러봤는데 연수구가 관리주체로 되어 있을 뿐, 관리가 부실하여 안타까운 모습을 보이고 있어 대책을 강구해야겠다고 안타까워하며 말 속에 힘을 주고 있었다.

부처님을 신앙하는 이웃종교인의 입장에서 볼 때에도 인천이 개발만을 정책 지상주의로 앞세우지 말고, 이제는 먹고 살만하니 옛 것과 공존하며, 문화유적을 잘 보존하였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랑스러운 역사건 치욕스런 역사건 간에 후손에게 알리고, 반성하며 힘을 기르고 과거에 진 빚을 갚아 나가는 보은의 정신을 보여야 할 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올 가을에는 118년만에 랜디스 아니 한국인으로 거듭난 남득시 의사를 다시 만나 볼 수 있을 것 같다. 왜냐하면 그가 손수 빨간 벽돌을 쌓아 집을 짓고 인술을 베풀던, 내동 성공회 성당 터에서 그의 선행을 잊지 않고 있는 사람들이, 가을음악회로 만나 제의(祭儀)를 올리는 것에 대신하려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글·사진=정암 차주현


이번 회를 끝으로 '클래식카메라로 만난 역사속 인천'은 연재를 마칩니다. 독자여러분의 양해 바랍니다.